콘야의 약사
콘야와 그 주변은 기원전 7천년 선사시대로부터 알려진 하나의 인류 정착 거주지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그리고 철기시대에 속한 아주 많은 유적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글씨가 기원전 3천5백년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라면
콘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착지들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콘야의 경계안에 있는 차탈휴육은 세계에서 첫번째로 농업을 사용했으며
야생동물의 공격에서 공동으로 방어하며 불을 첫번째로 사용했으며
인류의 첫 정착거주생활과 음식문화등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던 중심지로 추측되어진다.
콘야는 항상 문명의 중심지가 되어 왔는데, 히타이트,
리디야는 BC 6백년대 페르스는 BC 4백년대,
알렉산더대왕, 베르가마 왕정은 BC 2백년대, 로마는 AD 395년에 콘야와 그 주변을 통치했다.
7세기 초 사산왕조가 곧 같은 7세기 중반 무아비에의 명령에 에메비가 콘야를 일시적으로 점령했다.
10세기에까지 비잔틴의 도가 된 코냐는 아랍회교도인에 의한 공격당하고
말라즈기르트 전투보다 먼저 코냐에 온(1069) 터키 공격자들에 의해 셀축시대가 되었다.
대셀축제국의 왕 알파르스란(Alparslan)는 1071년 터키민족에게 아나돌루의 문을 열어주었다.
알파르스란왕은 승리후 사령관에게 아나돌루를 완전히 정복할 직책을 주었다.
그리고 콘야는 슐레이만 샤흐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후 슐레이만 샤흐는 콘야를 정복하면서 서쪽을 통치하고 중심지로 이즈닉을 선택하여
아나돌루 셀축 정부가 1074년 세워졌다. 정복과 함께 코냐에 터키-이슬람 시대가 시작되었다.
1097년 제1 십자군 전쟁에 의해 이즈닉을 점령당한 후 수도를 콘야로 옮겨
역사에 새로운 한 장을 더 연 콘야는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건축 유적과 장식 그리고 짧은 기간 아나돌루의 가장 번영하는 도시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제3 십자군 전쟁에 독일제국의 바르바르로사(F. Barbarossa)가 콘야를 포위하였으나
클르차르스란 2세의 수비에 성이 빼앗기지 않았고
5일 후 공격을 포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셀축시대가 몰락하기까지(1308) 콘야는 수도로 계속되었고
그후 카라만올루 봉건제국의 가장 큰 도시로 카라만봉건제국의 경영지가 되었다.
콘야는 1467년 오스만 영토에 포함되었고 현재는 터키공화국의
가장 큰 그리고 중요한 도시중의 하나로 화려한 과거와 미래로 가는 길에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콘야의 바오로 기념 성당에서의 미사 봉헌
일반적인 교통 수단인 궤도 전차
콘야 시가지
<콘야에서 안티오키아 가는 길에 있는 넓은 호수인 에이르디르 호수>
<아편의 원료인 양귀비를 재배하는 농지>
안티오키아(라틴어: Antiochia),
안타키아(터키어: Antakya, 라틴어: Antiochia ad Orontem)는
터키 남부 하타이 주의 중심지로 하타이 주의 주도(州都)이다.
기원전 4세기경 그리스계의 셀레우코스 왕조에 의해 안티오케이아가 건설되어
알렉산드레이아와 함께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초기 기독교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중요한 5개의 총대주교좌가 있는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안타키아는 터키 남부 오론테스 강 동안에 위치한 도시로 터키와 시리아의 국경 근처에 있다.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약 22km 정도 내륙으로 들어가 있으며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덥고 건조하다.
농업이 중요한 산물로 근처의 비옥한 아미크 평원에서 집약적인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어
가까운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 관련 산업이 현재 안타크야의 경제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밀, 목화, 포도, 올리브 등이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고 후계자 중 한 사람인
셀레우코스 1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세웠고 안티오케이아를 그 왕국의 중심도시로 정했다.
그 후 이 도시는 계속 셀레우코스 제국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으며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성장하였고
로마, 알렉산드레이아에 이어 당시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기원전 64년 로마에 편입되었고 시리아 속주의 주도가 되었으며, 제정 시대에도 계속 발전하였다.
특히 초기 기독교 때 선교와 신학 교육의 중심지로 크게 이름을 날렸는데
사도 바오로는 이곳을 중심으로 기독교 전파에 힘썼다.
그 후 동로마 제국 시대에도 중요한 도시로 발전했으며
기독교의 중요한 5개 총대주교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안티오케이아의 기독교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레이아의 기독교 학파와는 달리 인성(人性)을 중요시 여겼다.
동방 교회의 교부인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도 이 도시 출신의 신학자이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의 국력이 약해지자
안티오케이아는 두 번에 걸쳐 페르시아 제국에게 넘어갔다가
637년 이후 아랍계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슬람의 지배를 받은 이후부터는 예전의 번영을 잃고 작은 중소도시로 전락했다.
969년 비잔티움 제국 황제 니케포로스 2세가 이 도시를 다시 탈환하여 제국의 변경 요새로 삼았다.
1084년에는 당시 소아시아를 휩쓴 셀주크 투르크에 점령되었다가
1098년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십자군이 이 도시를 점령하여 안티오키아 공국을 세웠다.
안티오키아 공국은 두 세기에 걸쳐 라틴계 로마 가톨릭 독립국가로 존재했으나
1268년 시리아 및 이집트를 손에 넣은 맘루크 왕조의 침입으로 무너졌고
안티오크는 다시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1517년 오스만 제국이 안티오키아를 차지한 후 제1차 세계대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오늘날에는 터키의 도시가 되었다.
바오로 기념성당 유적
<네개의 돌기둥 문의 초석만 남아 있는 입구.>
반원형 야외 극장터와 잔해
<폐허가 된 원형 극장>
<정교하게 조각된 대리석 파편들이 옛 영화만을 전한다.>
바오로 기념성당 유적
유대교 회당 자리었던 곳에 성당을 세운 특별한 사례인
비잔틴 시대에 지은 바오로 대성당의 초석이 남아 있는데,
대성당을 건축하기 전에 작은 성당이 있었음을
이곳 주교 옵티모스(357 - 381)의 명패 모자이크 두개가 발견으로 입증되었다.
<세례터>
<대성당의 대리석 초석>
<대성당의 강단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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