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등왕 자야바르만 7세 | |
08동남아(베,캄) | 2008-09-08 (Mon) 13:57 | |
자야바르만 7세 (1120/25경~1215/19경) 크메르(지금의 캄보디아) 제국의 왕(1181~1215경 재위)으로 영토를 최대로 확장시켰으며 앙코르 톰을 비롯해 사원·도로·휴양소·병원 등의 건설 사업에 힘쓴 캄보디아의 영웅 왕의 화장터 위(문둥왕 테라스)에 있는 문등왕 자야바르만 7세 석상 생애 자야바르만 7세는 앙코르 왕가 출생으로 신심이 깊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인 자야라자데비 공주와 결혼했으나 일찍 죽자 역시 신심이 깊었으며 학식이 있어 이전에 불교사원의 수석교사로 임명된 적이 있는 그녀의 언니와 재혼했다. 자야바르만 7세의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현재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참파 왕국 근처에서 살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아버지 다란인드라바르만 2세(1150~60 재위)가 사망했을 당시 그는 참파에서 군사 원정중이었으며 그의 형(사촌인 듯함) 야소바르만 2세(1160~66 재위)가 즉위하자 자야바르만 7세는 참파에 그대로 남았고 뒤에 그는 궁정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캄보디아로 돌아왔으나 너무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트리부바나디티아바르만(1166~77 재위)이 야소바르만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지 못했고, 고향에 머물면서 왕위를 계승할 기회를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약 12년 후 자야바르만 7세가 50대 후반이 되었을 때 참파 왕국이 침입하면서 그 기회가 생겼다. 참파의 침입으로 트리부바나디티아바르만은 죽고 앙코르는 약탈당했으며 외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상황에서 자야바르만 7세는 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고 5년이 채 못 되어 침략자를 내몰았으며 캄보디아의 주도권을 장악해 1181년 61세의 노령으로 재건된 크메르 제국의 왕위에 올랐으며 30년에 걸친 황금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이 기간에 제국은 그 영역 판도나 왕실 건축 분야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건설사업 자야바르만 7세는 재위 동안 정복사업을 계속 벌여 참파, 남부 라오스, 말레이 반도와 미얀마 일부를 그의 지배하에 두었고, 점차 자신의 정력이나 조직 능력을 선대의 왕들이 해왔던 종교적·정치적 건설 사업에 쏟아 바욘을 비롯한 많은 멋진 사원을 새로 건립했다. 사원은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대승불교식 피라미드 사원으로서 왕실신앙의 중심점이자 자야바르만 자신의 능묘로 지은 대승불교식 장례사원으로 자야바르만의 부모에게 헌정되었다. 수많은 지방 사원에는 부처의 상징과 함께 자야바르만 7세를 묘사한 왕실 불상의 축소 모형을 두었는데, 그 원형은 바욘에 안치했다. 그는 현재의 앙코르 톰인 앙코르 시를 재건했고 간선도로도 확대하여 바욘과 왕국으로부터 각 지방으로 뻗어나 갔으며 이 도로들을 따라서 100개 이상의 휴양소가 지어지고 100개 이상의 병원이 만들어졌다. 자야바르만 7세는 왕국의 전역에 병원들을 설치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위대한 부처인 바이샤지아구루 바이두리아프라바의 가호 아래 두었다. 그의 시대에 건설된 사원들에서 치밀하지 못한 부분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자야바르만 7세는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건설사업을 진행하는 데 집착했던 것 같은데 어떤 학자들은 자야바르만 7세가 사원 건설에 조급한 마음을 가졌던 이유는 그가 많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부족한 시간이나마 효율적으로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한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또다른 학자들은 대부분 불교건축물인 방대한 건설계획은 불교, 특히 불교사원 건축에 큰 노력을 기울였던 아내 자야라자데비와 그녀의 언니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자야바르만 7세가 나병환자로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학자들의 추측이 맞는다면 자신의 죄를 덜고 공덕을 쌓음으로써 두려움을 이겨내겠다는 마음이 그의 신심과 종교적 열정에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의 진짜 동기가 무엇이었든지 자야바르만 7세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후손에게 물려줄 유산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크메르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도 자야바르만 7세가 이룩한 정도의 업적을 남긴 왕은 거의 없다. 현대의 명성 앙코르 왕국의 역사에서 자야바르만 7세가 그토록 중요한 인물이었는데도 후대 캄보디아 역사책에는 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근대에 그의 치세에 해당하는 시기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가 흥미를 끌면서 자야바르만 7세는 모범적인 민족영웅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캄보디아 국가 영토를 가장 넓게 확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영향으로 복지국가를 건설하여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욕구를 충족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야바르만 7세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는 보다 공정하다. 학자들은 자야바르만 7세가 성취한 거대한 업적을 인정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왕조의 인적·물적 자원을 과도하게 소모했기 때문에, 이후에 크메르 제국이 창조성을 상실하고 마침내 몰락하게 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앙코르 톰 사원 문둥왕 테라스에서 본 코끼리 테라스와 군대를 사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넓은 장소 코끼리 테라스 The Terrace of Elephants 왕궁의 정문인 동쪽 입구에 약 350m길이로 이어지는 단상으로 왕이 공공행사나 군인들의 사열을 관장하던 곳으로 동쪽 광장을 향하고 있는 단상은 3개인데 양 옆은 코끼리들이 부조되어 있고 중앙쪽의 단상은 가루다가 받치고 있다. 중앙의 것은 왕이, 양옆의 것은 신하들이 사용하던 것 같다. 단상 위에는 나무로 된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이 곳에 올라 서면 아래 중앙광장에서 장대한 병사들의 분열과 코끼리 퍼레이드 등이 금방이라도 펼쳐질 것 같고 세계 최고의 권력을 가진 왕의 위용을 가늠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코끼리 테라스 아래 코끼리 테라스
군대 사열대로 추정되는 단과 아래 넓은 공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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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앞쪽 끝에는 12개의 탑(12 Prasate Sour Prat)이 열병하듯이 서 있어
위용을 더하고 있는데 파수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들 위에는 크레앙(The Kleangs)이라는 건물들이 있는데 이는 ‘창고’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건물의 용도는 외국에서 온 사실들을 접대하는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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