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 교회 유적

사르디스(지금의 사르트) 동남쪽 45km 지점에 옛날의 필라델피아(지금의 알라쉐히르)가 있다.

요한묵시록에서 그리스도는 7교회 중 스미르나와 필라델피아 교회만은 나무라지 않으시고

필라델피아 교회만은 오히려 칭찬하셨다.

 

유적으로는 베쉬 에일뤨지구 장터에 사도 요한 성당의 거대한 붉은 벽돌 기둥만 남아 있다.

유적으로 봐서 성당의 규모가 어마어마 했을거라는 추론이 나온다. ​









<유적지 군데군데에 그리스 정교도들의 석관과 묘비들이 널려 있다.>



 

  

라오디케아

 

현재 ALAHSEHIR로 불리는 라오디게아는 예전에는 에페소와 수리아의 중간에 위치하여

에게해에서 아시아의 중심으로 뻗어나간 로마의 길이 관통하는 도시로, 

파묵깔레에서 서쪽으로 6.5km, 빌라델비아에서 동남쪽으로 72km,

에페소에서 남동쪽으로 160km정도 떨어진 교통의 요지인 리커스 계곡에 위치하여

최고의 상업도시로 발전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는 몇번의 대지진을 격었는데,  AD 17년 대지진으로

라오디게아가 모두 파괴되자 로마에서 도와주고자 했지만

라오디게아는 이를 거절하고 순수 라오디게아인들의 힘만으로 도시를 재건했다.

이 정도로 라오디게아는 엄청난 부를 갖춘 도시였다.
이런 부의 근본이 된 것은 물론 무역과 통신이었지만 기간 산업인 양모와 목화 또한 주축이 되었다.

이 지역의 양모는 광택이 나는 검은색 양모로서 가격이 높았으며 인기가 좋았다.

이들의 부는 로마의 키케로가 거액의 신용장을

라오디게아에서 현금화 했다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라오디게아는 의학이 발전했었다. 이 곳의 눈병 치료약은 매우 뛰어나서

많은 이들이 찾았는데 "브루기아가루'라 불린 이 안약 때문에

라오디게아는 의료 도시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발전한 의학은 유명한 의학교가 뒷받침을 해 줬으며

치료의 신 멘카루의 신전 주위에서 거의 모든 약품둘이 거래 되었다.

이렇듯 엄청난 부를 가진 라디오게아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다.

그래서 종교적 핍박이 그렇게 심하지도 않고 경제적 궁핍도 없는 상황에서 포교 활동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렇듯 경제적인 부유함은 사람들에게 교회와 하느님을 간구할 필요성을 못 느끼게 해

하느님에게 덥지도 차지도 않다하여 질타 받게 된다.

이 질타는 라오디게아에서 6.5KM 정도 떨어진 히에라폴리스에서 온천수를 수로로 가져오면서

식은 미지근한 물에 비유하여 라오디게아인들을 질타했다고도 풀이된다.

이렇듯 부유했던 라오디게아는 몇 차례의 대규모 지진으로 현재의 유적지도

 모두 땅속으로 함몰되어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이 돌로 포장된 곧은 길과

시가지 건물들의 잔해,교회 터로 볼 수 있는 유적 하나와 야외극장 하나만  남아 있다.



 

 

                               <유적지의 중앙도로 마차바퀴에 의해 바위가 움푹 파인 자국이 선명하다>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유적 복구작업 중이나 진척이 별로 없단다.>                

 

















                                  <성당터 임을 증명하는 십자가 새겨진 바위와 제단>

                                                <규모는 크나 거의 허물어진 원형극장>









 

   로세

소아시아의 부르기아 서남쪽에 있던 성읍. 라오디케아, 히에라폴리스와 함께 소아시아에서 시리아로 가는 동서 교통의 요지로, 한때 번영을 누렸으나

신약시대에는 쇠퇴하였다.바울의 제자이자 동역자인 에파프라스

골로새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후 몇차례의 대지진으로 도시 자체가 완전히 함몰되어

 지금은 흙이 쌓인 언덕에 유적지 안내판만 세워져 있다. 


 

 
'

파묵칼레(Pamukkale)

파묵칼레(Pamukkale)는 터키 남서부 데니즐리에 위치한 석회붕을 말한다.

파묵칼레는 터키어로 파묵은 목화를,  칼레는 을 뜻하므로 '목화성'이란 뜻이다

 

 파묵깔레의 석회층은 자연이 만들어 낸 경이로운 산물로,

대지 상부에서 흘러 내려온 석회 성분을 포함한 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결정체를 만들고

이것들이 점차적으로 쌓여져서 현재의 광활하고 희귀한 경관을 만들어 낸 것이다.

딱딱해진 광활한 하얀 석회층의 패인 곳에 상부쪽에서 흘러내려온 온천수가

맑은 날에는 푸른 색을 띠는 장관을 연출하며 담겨 야외 온천을 만들기도 한다.  

 파묵칼레 전체에서 발을 담글 수 있는 곳은 온천수로이거나 왼쪽의 계단식 얕은 연못 정도다.

물 온도는 미지근한 정도로 얕은 곳은 좀 차갑기도 하다.

맨발로 미끈미끈한 석회층을 밟아보거나 석회 반죽(?)을 발로 짓이겨 보는 등

재미있는 체험을  할 수 있고   단순히 발 담그는 곳뿐만 아니라 통로의 역할도 해서

파묵칼레 입구에서 걸어올라갈수도, 반대로 걸어 내려갈 수도 있다.

파묵깔레는 석회층으로 인해 만들어진 환상적인 경관과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의 풍부한 볼거리가 절묘하게 조합된 곳이다.

터키여행의 백미는 파묵칼레 관광이다. 

 
 
                                  ​히에로폴리스 박물관 바로 아래에서 본 파묵칼레의 풍광












                               왼쪽으로 이어지는 얕은 연못이나 수로에서 미지근한 야외온천을 할 수 있다. 






                                     

파묵칼레 아래 온천수가 모이는 연못에서 바라본 풍경






                                     파묵칼레에서 내려온 물이 만든 연못에서는 보트도 탈수 있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파묵칼레 인근 마을에 있는 빌라식 호텔




                                                  호텔 부속 야외온천과 풀장






                                                   
                                 
                               호텔 부근의 재래시장-값이 싸고 물건들도 다양하다.
 
                                         호텔에서 만난 길냥이들 -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히에라폴리스 [ Hierapolis ]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3세기에는 시리아 왕의 지배에 있었으나

기원전 2세기 말에는 버가모 왕국의 지배에 있었다.

이 도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번창해나가다가

기원후 50년에 대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만 네로 황제때 재건되었다.

당시 히에라폴리스는 치료 휴양의 도시이자 상업의 도시였다.

히에라폴리스 도시는 한때 인구가 8만명에 이르렀으나 계속되는 지진,

아랍인의 침입, 셀주크 터키 군과 비잔틴 제국 군대 간의 전장이 되는 바람에

급격히 황폐해졌으며 12세기 이래 폐허로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시작된 발굴 작업으로 히에라폴리스 폐허는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히에라폴리스에는 2세기경에 건축된 1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극장이 있고,

온탕과 냉탕을 갖춘 로마 목욕탕이 있다.

현재는 로마 목욕탕의 일부가 복원되어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성문 밖 북쪽 1km 지점에는 1200개에 달하는 석관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히헤라폴리스 복원 조감도와 출입구 

                                                           <히에라폴리스의 성곽과 성문>

 


​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





                                                    

원형극장 무대 뒷편에서 본 풍경들



 

 

사도필립이 순교한 히에라폴리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부름을 받은 필립(Philip-말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은영적으로 우둔하여 실수도 많이 하였으나,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필립은 열심으로 복음을 전파하다가

히에라폴리스에서 순교하여 아래 사진의 무덤에 묻혔다고 한다

 

<성 필립의 무덤>
 

                                           로마식 목욕탕을 개조하여 만든 히에라폴리스박물관

 

 

박물관 앞의 폐허가 된 유적지



 

 







 

 

콘야의 약사

콘야와 그 주변은 기원전 7천년 선사시대로부터 알려진 하나의 인류 정착 거주지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그리고 철기시대에 속한 아주 많은 유적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글씨가 기원전 35백년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라면

콘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착지들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콘야의 경계안에 있는 차탈휴육은 세계에서 첫번째로 농업을 사용했으며

야생동물의 공격에서 공동으로 방어하며 불을 첫번째로 사용했으며 인류의 첫 정착거주생활과

음식문화등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던 중심지로 추측되어진다.

 

콘야는 항상 문명의 중심지가 되어 왔는데, 히타이트, 리디야는 BC 6백년대

페르스는 BC 4백년대, 알렉산더대왕, 베르가마 왕정은 BC 2백년대,

 로마는 AD 395년에 콘야와 그 주변을 통치했다.

7세기 초 사산왕조가 곧 같은 7세기 중반 무아비에의 명령에

에메비가 콘야를 일시적으로 점령했다.

10세기에까지 비잔틴의 도가 된 코냐는 아랍회교도인에 의한 공격당하고

말라즈기르트 전투보다 먼저 코냐에 온(1069) 터키 공격자들에 의해 셀축시대가 되었다.

대셀축제국의 왕 알파르스란(Alparslan) 1071년 터키민족에게 아나돌루의 문을 열어주었다. 

알파르스란왕은 승리후 사령관에게 아나돌루를 완전히 정복할 직책을 주었다. 

그리고 콘야는 슐레이만 샤흐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후 슐레이만 샤흐는 콘야를 정복하면서 서쪽을 통치하고 중심지로

이즈닉을 선택하여 아나돌루 셀축 정부가 1074년 세워졌다. 

정복과 함께 코냐에 터키-이슬람 시대가 시작되었다.

 

1097년 제1 십자군 전쟁에 의해 이즈닉을 점령당한 후 수도를 콘야로 옮겨 

역사에 새로운 한 장을 더 연 콘야는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건축 유적과 장식

그리고 짧은 기간 아나돌루의 가장 번영하는 도시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3 십자군 전쟁에 독일제국의 바르바르로사(F. Barbarossa)가 콘야를 포위하였으나

클르차르스란 2세의 수비에 성이 빼앗기지 않았고 

5일 후 공격을 포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셀축시대가 몰락하기까지(1308)  콘야는 수도로 계속되었고

그후 카라만올루 봉건제국의 가장 큰 도시로 카라만봉건제국의 경영지가 되었다.

콘야 1467년 오스만 영토에 포함되었고 현재는 터키공화국의 가장 큰  주요 도시중의 하나로

화려한 과거와 미래로 가는 길에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콘야의 바오로 기념 성당에서의 미사 봉헌





























                                <콘야에서 안티오키아 가는 길에 있는 넓은 호수인 에이르디르 호수>



                                     <아편의 원료인 양귀비를 재배하는 농지>

안티오키아(라틴어: Antiochia), 

 

안타오키아 터키 남부 하타이 의 중심지로 하타이 주의 주도(州都)이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계의 셀레우코스 왕조에 의해 안티오케이아가 건설되어 

알렉산드레이아와 함께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초기 기독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중요한 5개의 총대주교좌가 있는 도시 중 하나였다.

 

안타키아는 터키 남부 오론테스  동안에 위치한 도시로 터키와 시리아의 국경 근처에 있다.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약 22km 정도 내륙으로 들어가 있으며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덥고 건조하다. 

농업이 중요한 산물로 근처의 비옥한 아미크 평원에서 집약적인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어

가까운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 관련 산업이 현재 안타크야의 경제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밀, 목화, 포도, 올리브 등이다.

 

기원전 323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고 그의 뒤를 이은 후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셀레우코스 1 셀레우코스 제국을 세웠고 안티오케이아를 그 왕국의 중심도시로 정했다. 그 후로 이 도시는 계속 셀레우코스 제국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으며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성장하였고 로마, 알렉산드레이아에 이어 당시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기원전 64 로마에 편입되었고 시리아 속주의 주도가 되었으며, 제정 시대에도 계속 발전하였다.

특히 초기 기독교 때 선교와 신학 교육의 중심지로 크게 이름을 날렸는데 

사도 는 이곳을 중심으로 독교 전파에 힘썼다. 

그 후 동로마 제국 시대에도 중요한 도시로 발전했으며

기독교의 중요한 5 총대주교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안티오케이아의 기독교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레이아의 기독교 학파와는 달리 인성(人性)을 중요시 여겼다. 

동방 교회 교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도 이 도시 출신의 신학자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국력이 약해지자 안티오케이아는 두 번에 걸쳐 페르시아 제국에게 넘어갔다가

637 이후 아랍계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슬람의 지배를 받은 이후부터는 예전의 번영을 잃고 작은 중소도시로 전락했다. 

969 비잔티움 제국 황제 니케포로스 2가  탈환하여 제국의 변경 요새로 삼았다.

 

1084에는 당시 소아시아를 휩쓴 셀주크 투르크에 점령되었다가 

1098 제1 십자군 원정 당시 십자군이 이 도시를 점령하여 안티오키아 공국을 세웠다. 

안티오키아 공국은 두 세기에 걸쳐 라틴계 로마 가톨릭 독립국가로 존재했으나 

1268 시리아  이집트를 손에 넣은 맘루크 왕조의 침입으로 무너졌고

안티오크는 다시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1517 오스만 제국이 안티오키아를 차지한 후

 제1 세계대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현재 터키의 도시가 되었다.

 

바오로 기념성당 유적









                                  <네개의 돌기둥 문의 초석만 남아 있는 입구.>

 

 

<폐허가 된 원형 극장>

                                   <정교하게 조각된 대리석 파편들이 옛 영화만을 전한다.>

 유대교 회당 자리었던 곳에 성당을 세운 특별한 사례인 비잔틴 시대에 지은

바오로 대성당의 초석이 남아 있는데, 대성당을 건축하기 전에 작은 성당이 있었음을

이곳 주교 옵티모스(357 - 381)의 명패 모자이크 두개가 발견으로 ​입증되었다.



 

 

                                                               <세례터>

                                                  <대성당의 대리석 초석>

 

                                                            <대성당의 강단 유적>

 

 

 

콘야 에블라나박물관

콘야는 터키 중부 내륙 지역의 도시로써 옛날 셀축트루크의 수도였던 터키 주요 도시이다.

그 옛날 비단길, 도자기의 길, 면화의 길, 향료의 길이라는 다양한 이름의 길이

대부분 콘야를 거쳤을 만큼 교통의 요지이다.

 

콘야는 메소포타미아문명의 발상지인 유프라테스강이 근처에 흘러 형성된

인류 최초의 주거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콘야는 메블라나 루우미가 12세기에 창시한 이슬람 소수파인 수피 교단 중 하나인

터키 이슬람 메블라나 교단의 본산지이다.

메블라나는 유일신 알라와 만나기 위해서는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하며,

금욕과 고행을 통한 끊임없는 기도생활을 해야 한다고 본

다소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는 터키 특유의 이슬람이라 할 수 있다.

이 교단의 수피들은 매블래비(Mevlevi), 또는 소용돌이치는

수도승(The Whirling Dervish)이라고 불리었는데,

교단의 수피들이 격렬한 행위를 하도록 하여 그 절정을 이루게 함으로서

예배를 수행하는데서 Whirling Dervishes 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고,

이 신비를 체험하는 방법으로 나온 것이 Whirling Dance 이다.

 

 남성 무용수, 원통형 모자, 하얀 윗도리, 둥근 치마, 침묵 속의 댄스로 요약되는

The Whirling Dervish는 춤추는 자를 황홀의 경지로 이끌기에 충분해 보였다.

이러한 특수한 수련 방식은 신비주의적 색채가 농후하다는 이유로

정통 이슬람에서는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이슬람은 알라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도록 할 뿐

개인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 

                                                        카파도키아 부근의 터키석 판매점





 

 

 

                                                        슐탄이 지어준 대상들의 숙소









 



                                             <끝없는 고속도로를 달리다 혹간에 만나는 휴게소>

 

 

에블라나 박물관

메블라나 박물관은 콘야인들의 자랑이다.

박물관에는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를 창시한 메블라나의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원래 궁전의 장미 정원이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왕이

메블라나의 아버지 바하틴 벨레디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입구에서부터 가장 이색적으로 인상을 주는 푸른색 타일로 장식된 탑은 1396년에 세워진 것이다.

 터키 정부가 이곳을 박물관으로 개장한 것은 관은 1927년이다.

The Whirling Dervish의 창시자인 메블라나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던 이 박물관은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The Whirling Dervish의 명성 때문에

1년에 백만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온다고 한다.

내부 촬영이 엄격히 규제되어 아쉽다.

























 

                                 Whirling Dance 를 추는 수피들의 사진

 

                                                         박물관의 아름다운 정원





 터키의 현대적인 전통가옥

                                   <사도 바오로가 돌을 맞고 쫓겨난 산간벽지인 리스트라

                                                --높은 바위가 성벽처럼 둘러싸인 지형이 이채롭다.>



                                     

                                    지중해 에게해에  위치한 안탈랴 크라운 플라자 호텔















 

 

 

 







 


 

 




 


 

카파도키아 괴레메

카파도키아에서 괴레메 여행의 시작점이 되는 괴레메 야외박물관(Open Air Museum)은

4세기부터 이 지역의 독특한 기암괴석을파내 만들어진 교회와 수도원이 모여있는 곳이다.

말 그대로 열려 있는 박물관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곳에서는 박해를 피해온 수도사들이 살던 집과 30여 개가 넘는  교회들을 볼 수 있다.

교회마다 비잔틴의 영향을 받은 벽화를 볼 수 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훼손되었지만,

동굴에 빛이 들어가지 않는 곳은 보존 상태가 좋은 벽화도 남아있다.

 

 

                         버섯바위들로 이루어진 지형을 지나 괴레메로 이동 증 촬영한 차창 사진들



 

 




 

                                   괴레메 언덕의 바위들의 속을 파내어 조성되어 있는 교회들

                                                            큰 바위들이 하나의 독립교회다










< 계곡의 교회들 창 옆에 3개의 구멍이 있는데 비둘기를 길러 단백질을 공급받고

알은 벽화를 그리는 안료의 원료로 사용했다고 한다>

















                                       카파도키아 전체를 전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비경

 

 

 



 

                                   <하얀 색깔의 융기된 바위가 아름다운 비경도 있다>

 

                                       <하룻밤을 숙박한 파카도키아 라마다 호텔>



                                  ​<우리나라와는 달리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길냥이들>

 
'

 

카파도키아​

카파토키아는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터키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활화산이었던 예르지예스산(3917m)이 화산 폭발로 흘러내린 용암이 오랜세월에 걸친

 풍화, 침식작용으로 부드럽고 쉽게 깍이는 응회암 지대로 바뀌었다.

지하도시인 데린구유와 같이 쉽게 노출되지 않아 종교탄압시기 기독교인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

대표적인 버섯 바위와 기암속에 숨은 기독교 벽화들, 수십미터씩 파내려간
지하 도시등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노천 그 자체가 작품이다.

경기도 만큼 넓은 면적 전체에 볼거리가 흩어져 있어  짧은 시간에 곳곳을  다 볼 수는  없어,

열기구를 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내려다 보는 투어가 있는데 날씨 관계로

투어가 취소되어 못내 아쉬웠다. 

아나톨리아 고원의 중심부에 자리한 대규모 기암지대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모양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신비스럽고 기이한 형태를 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바위들이

 산재해 있는 이 곳은 1985년 세계자연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산 중턱에 옛 교회의 잔재가 흩어져 있는가운데 이슬람 사원이 있다>




                                               <산세 자체가 오묘하여 신비스럽다.> 









 

                              <암굴식당에서 맛있는 점심과 와인을 먹으니 분위기가 좋았다.>

                                         기묘한 풍경에 차 안에서 연신 셔터를 눌렀다.  














 


차에서 내려 경이로운 모습에 넋을 놓았다.























<토끼 바위>





​<육영수 여사 바위(?)>

 

                                                            <삼위일체 바위>

 

풍화가 심한 응회암 아래에 비해 잘 견디는 의 현무암이 마치 버섯처럼 생겼다. 





 

                                  다시 차로 이동하면서 감상한 경이로운 자연의 모습들......













 

 

 

                                              <하룻밤을 숙식한 카파도키아 라마다 호텔>

 

                                이튿날 새벽 열기구를 타려고 했으나 기상악화로 기회를 놓친 아쉬움



 

 

                                         열기구 타러 가는 길에 촬영한 차창 사진











 

 



 

 

 

                 사도바오로의 출생지인 타르소스(다르소)에 있는 바오로 기념성당

 













 

​             순례자들을 끌어들이려고 신빙성 없이 어느 부잣집 우물에 '바오로 생가 우물터' 라 이름 붙였다 







                      로마로 통하는 곧은 길 - 돌로 잘 포장한 길 옆에 상가가 있던 터와 흔적이 있다

 

버스에서 본 터키의 풍광들

 



 

데린구유(깊은 우물이라는 뜻)

최대 3만명이 살았던 대규모 지하도시로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지하로 들어와

교육기관과 십자가형 교회,와인저장고,마굿간과 거주지, 병기고 등이 지하 8층까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환기가 잘되며​ 지하에서 일기도 관측할 수 있다.

규모는 다르나 40여개의 지하 거주지가 발굴​되어 1965년 처음 일반에 공개되었으나

관람구역은 전체의 10%에 불과하다.​



 

 

14박 15일('14/06/02 - 06/16)간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수도회)

김성태 (토마) 신부님이 인솔하는

성지대표부 28차 성지순례단 32명이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여행길에 오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지상 모습이 신기할 때가 많다.







 

 

이스탄불 상공





성지순례 관광버스와 이스탄불에서 묵은 호텔

 

 

<호텔 바로 앞에 있는 이슬람 사원 

-- 국민 98%가 이슬람교인인 터키에는  사원이 공동체의 중심이다.>

바오로의 탄생지 타르소스를 가기 위해 국내선 항공기를 타다.



해발 3000m를 넘는 타우루스(황소) 산맥의 만년설



비행기에서 본 터키의 어느 도시와 산지와 평야



 

 

                                                    가로가 잘 정비된 어느 도시의 도로

                        <우리나라 포항처럼 철강도시인 이스켄데른시가 해안선을 따라 길게 뻗어있다.>



                                           이슬람국가는  이슬람 사원이 마을의 중심이다.

 

 
 

세계 복합문화유산  메테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세계 복합문화유산인 

그리스 메테오라 수도원 사진이 안 떠서 재발행합니다. ****


그리스 메테오라 수도원

세계 복합문화유산  메테오

세계 복합유산으로 지정된 메테오라는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는 수도원'이라는 뜻이며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 위에 세워져 있어 '하늘의 기둥'으로도 불렸다.

한때 스물세 개의 수도원이 세워졌으나 불안정한 지반 때문에

 18세기 말에 대부분 무너졌고  

현재는 수도원과 수녀원을 합해 여섯 곳 만이 남아 있다. 

 

 바위들의 평균 높이는 300m, 가장 높은 것은 550m나 되니 

수도원들은 정말로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이다. 

메테오라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 중부 테살리아 지방 

북서부 트리칼라 주의 바위 기둥들과 

그 위에 세워진 수도원을 통칭하는 말이다.

<메테오라에 진입하면서 차에서 촬영한 웅장한 바위산>

 

양갈비 점심식사를 한 식당에서 촬영한 사진들.......

 

                                    메테오라 수도원 올라가는 험로에서 촬영한 차창사진....

 

 

바를라함 수도원(The Holy Monastery of Varlaam)    

바를라암 수도원은 메테오라에서 대 메테오른 수도원에 이어 

두번쩨로 큰 수도원으로 1541년에서 1542년에 세워졌다. 

은둔한 수도자 바를라암에 의해 세워졌으며, 

후에 그의 이름을 따서 바를라암 수도원이라 불리웠다.

예수, 마리아, 베드로, 바오로, 싯소이스 벽화가 유명하다.

 

 

성 트리니티 수도원(The Monastery of Holy Trinity)  

가장 관람하기 어려운 수도원으로 입구에 도착하기 전에 

방문자들은 계곡을 건너서 바위를 지나 위로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1476년 수도사 도메티우스에 의해 세워졌으며, 

이곳 교회에는 서투르게 그려진 벽화(200년후에 추가됨)가 보존되어 있다. 

두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돔으로 된 이 교회는 

1475년에서 1476년에 세워졌으며, 십자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트리니티 수도원은 정원과 구조물이 서로 분리되어 

그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으며, 

멀리 눈으로 덮힌 핀도스 산맥이 바라다 보인다.
 속세와의 차단을 위해 물자 보급과 사람들의 출입은 

도르래를 이용해 광주리에 담아 끌어올리거나 

밧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거나 하였으나 

1925년에 돌을 쪼아 140계단을 만들었으므로 지금은 걸어서 올라간다.



사진 우상 귀에 도르래 장치가 보인다.

 

수도사 도메티우스가 수도하던 방

수도원의 복도

공구실과 제작된 목공예품

 

수도원에서 선종한 수사들의 유골 보솬함

 

지금은 일부가 박물관으로도 이용되고 있는 돔 모양의 성당 외관

성당(박물관) 내부의  서투르게 그려진 벽화

 

수도원에서 사용했던 각종 기구들

 

성 스테파노 수녀원

성 스테파노 수녀원은 다른 수도원들과 비교해 작은 편이지만 

메테오라의 수도원들 중 가장 잘 보존되어 현재 수녀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는 16세기 중반에 세워진 1개의 작은 본당이 있는 

성 스테파노스 교회가 있으며 사마리아 여자(요한4 ), 

물고기 잡이 기적(요한 21 )벽화들과 감탄이 절로 나는 황금 잎새 조각상과 

성 카랄람보스의 성스러운 두상이 은그릇에 보관되어 있다

<수녀원에서 내려다 본 메테오라 시가지>

<메테오라에서 투숙했던 호텔 디바니>

호텔 뒷편에서 촬영한 메테오라 암벽산

 

메테오라 시내의 모습들

메테오라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서 본 풍경











안명옥 주교와 함께하는 동유럽 성지순례단 단체사진











프라하 까를교와 틴성당

여러 차례의 전쟁에도 피해를 당하지 않고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프라하는 도시 전체가 관광명소다.


까를교

블바타 강에 있는 오래된 석조다리인 까를교는

10세기 초에 목재다리, 12세기에 석재로 개축했으나 홍수에 유실되고,

지금의 다리는 1357년 착공하여 1402년에 완공됐다.

길이 520m, 폭 10m의 다리 양끝에는 고딕양식의 타워가,

양쪽 교각에는 성서에 나오는 성인상 30개가 250년에걸쳐 제작되었다. 

공연장이거나 박물관인 듯

까를교 부근에서 본 체코 왕궁


프라하 시민회관(?)

올드카 관광 중 촬영한 시가지


틴성당

동화에 나오는 독특한 형태의 첨탑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성당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

약 9,000평방m인 광장 중앙에는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처형 500주년을 맞는 1915년에 건립한 조각상과 분수가 있고,

프라하의 역사적 사건의 무대였고,

주변에 구시청사, 틴성당, 킨스키 궁, 각종 가게가 많아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성 니콜라스 성당


프라하 구시청사 천문시계

구시청사 벽의 천문시계는 1410년 제작되었고,

1490년 외관에 조각장식과 달력을 추가했다.

여러번 작동을 멈추웄다가 1948년에야 다시움직이게 됐다.





까를교 끝에 있는 화약탑.


화약탑 옆에 위치한 프라하 시민회관


프라하 박물관


프라하 아기예수 성당


로레타 수녀원에서 구시가지 가는 길의 모습


승리의 성모(아기 예수)성당


승리의 성모 마리아 성당은 루터파 소속이었던 트리티니 교회로 

1613년 프라하에서 처음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지만 

백산전투 후에 가톨릭에 인수된 후 재건되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승리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 되었다. 

내부 오른쪽 대리석 제단에는 ‘프라하의 아기 예수’ 

밤비노 디 프라가(Bambino di Prague)라는 밀랍으로 만들어진 

아기 예수상이 안치되어 있어 가톨릭에서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기도처로 유명하다.

 제대 앞을 흰천으로  가리고 공사 중인 성당 내부 


아기 예수상

16세기 스페인에서 옮겨져 프라하에 정착하게 된 이 아기 예수상은 

약 60cm 크기로 나무로 된 조각에 밀랍이 씌워져 있다.

 3살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머리 위에는 

아주 큰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이 씌워져 있고 

대관식용 외투를 걸치고 있는데 이 외투는 일 년에 여러 차례 갈아입는다.

 왼손은 십자가가 달린 지구의를 들고 있고 

오른손은 축북을 내리는 듯 위로 들고 있다.

 아기 예수상이 세워진 제단을 지나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아기 예수가 입는 옷들과 사진을 전시한 박물관이 있는데 

이곳에 전시된 옷들은 개인이나 기관들로부터 기증받은 것들이다. 

전시되고 있는 것 외에도 아기 예수가 갖고 있는 외투는 총 200여 벌이 넘는다.

색동옷으로 만든 한복도 있다.




화려한 성당 내부의 모습들....



주교님 집전의 미사 봉헌


올드카를 타고 시내관광을 하다.



바츨라프 광장

바츨라프 광장은 광장이라기 보다 파리의 샹젤리제처럼 

길이 750m, 폭 60m의 대로다.

10세기 체코 왕 성 바츨라프의 이름을 딴 광장에는 

보헤미아의 수호자였던 왕의 기마상과

추가된 4명의 수호성인 기념상이 서 있다.

 


맛있게 먹은 한식당


저명인사의 장례식 행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