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 에페소 유적지

 에페소 

에페소스 (라틴어: Ephesus 터키어: Efes,)

 

에페소스 (라틴어: Ephesus 터키어: Efes,) 공동번역성서에서는 에페소)는 

서부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에 (현재의 터키) 위치한, 

BC 1500 - 1000 년 사이에 처음 건설되어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7-6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다.

 에페소스는 주변 도시 혹은 국가, 스파르타페르시아페르가몬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화 되는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식민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페소스는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6세기에 건조된 웅대한 아르테미스 신전과 로마 제국시대에 건조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 도미티아누스신전 (기원후 1세기)도 유명하다. 

특히 아르테미스는 기독교가 들어오기전 에페소인들에게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받던 대상이어서, 루가에 따르면 사도 바오로가 선교를 할 때 

은으로 만든 신전모형을 팔던 상인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도 바오로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자고 설교하여, 

사람들이 신전모형을 더이상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페소스는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오로가 전도와 사목을 한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 교회였다. 

또한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7개의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교회일 정도로 1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비중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국 성공회의 폭스 신부가 쓴 《순교자》에 따르면 사도 성 바오로의 

제자인 디모테오가 주교로 사목한 교회가 에페소 교회라고 한다.

 


<에페소 유적지 안내도 - 클릭하면 확대됨>



<공용 아고라 터>



<오데온 - 원로회의장이나 콘서트홀로 사용한 소극장>
 

 



<프리타레이온 - 도시의 번영을 나타내는 가정의 수호자이자 불의 여신인 헤스티아
를 기리는 영원의 불이 있었던 신전> 

 



<멤비우스 기념비>
 

 



<도미티안 신전-로마 도미티아누스황제를 기념하는 신전>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나이키 부조 조각상>

 



<크레테스 거리>



<트라이안 분수>



<마제우스와 미트라다테스의 문>



<유곽>




<공중화장실의 대리석 수세식 변기>





<셀수스 도서관 - 현재의 대학>












 

 


 

 



아르테미스 여신 조각상



<대극장>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히에라폴리스 [ Hierapolis ] 

  히에라폴리스 [ Hierapolis ]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3세기에는 시리아 왕의 지배에 있었으나 

기원전 2세기 말에는 버가모 왕국의 지배에 있었다.

 이 도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번창해나가다가 

기원후 50년에 대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만 네로 황제때 재건되었다. 

당시 히에라폴리스는 치료 휴양의 도시이자 상업의 도시였다.

히에라폴리스 도시는 한때 인구가 8만명에 이르렀으나

 계속되는 지진, 아랍인의 침입, 셀주크 터키 군과 비잔틴 제국

 군대 간의 전장이 되는 바람에 급격히 황폐해졌으며

12세기 이래 폐허로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시작된 발굴 작업으로 히에라폴리스 폐허는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히에라폴리스에는 2세기경에 건축된 1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극장이 있고, 온탕과 냉탕을 갖춘 로마 목욕탕이 있다. 

현재 로마 목욕탕의 일부가 복원되어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성문 밖 북쪽 1km 지점에는 1200개에 달하는 석관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히헤라폴리스 복원조감도와 관광객 입출구




<히에라폴리스의 성곽과 성문>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

고대 원형극장 치고는 파괴가 덜 됐다.







아래에서 본 원형극장 뒷편 모습





사도 필립이 순교한 히에라폴리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부름을 받은 필립(Philip-말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은 영적으로 우둔하여 실수도 많이 하였으나,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필립은 열심으로 복음을 전파하다가 히에라폴리스에서 순교하여 아래 사진의 무덤에 묻혔다고 한다







로마식 목욕탕을 개조하여 만든 히에라폴리스박물관





성안의 넓은 땅에는 유적의 잔해가 너부러져 있고 무심한 작은 나무가 자리를 지킨다.





 원형극장 무대 뒷편에서 본 풍경들




 


 

사도필립이 순교한 히에라폴리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부름을 받은 필립(Philip-말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은 영적으로 우둔하여 실수도 많이 하였으나,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필립은 열심으로 복음을 전파하다가 히에라폴리스에서 순교하여 아래 사진의 무덤에 묻혔다고 한다


<성 필립의 무덤>
 

로마식 목욕탕을 개조하여 만든 히에라폴리스박물관 

박물관 앞의 폐허가 된 유적지
사진 우상 귀퉁이의 하얀 부분이 파묵칼레다
모든 유적이 허물어지고 원주 5개가 덩그런히 서 있다.

페허 속에서도 달래와 접시꽃 그리고 열대식물이 자라고 있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파묵칼레


파묵칼레(Pamukkale)


파묵칼레(Pamukkale)는 터키 남서부 데니즐리에 위치한 석회붕을 말한다.

 터키어로 파묵이 목화, 칼레는 을 뜻하므로 파묵칼레는 '목화성'이란 뜻이다

 

 파묵깔레의 석회층은 자연이 만들어 낸 경이로운 산물로, 

대지 상부에서 흘러 내려온 석회 성분을 포함한 물이 오랜 세월에 결정체를 만들고 

이것들이 점차적으로 쌓여져서 현재의 광활하고 희귀한 경관을 만들어 냈다. 

딱딱해진 광활한 하얀 석회층의 패인 곳에 상부쪽에서 흘러내려온 온천수가 

맑은 날에는 푸른 색을 띠는 장관을 연출하며 담겨 야외 온천을 만들기도 한다.  

 파묵칼레 전체에서 발을 담글 수 있는 곳은 온천수로나 왼쪽의 계단식 얕은 연못이다. 
물 온도는 미지근한 정도로 얕은 곳은 좀 차갑기도 하다. 
맨발로 미끈미끈한 석회층을 밟아보거나 석회 반죽(?)을 발로 짓이겨 보는 등
 재미있는 체험을 할 수 있고 이곳은 단순히 발 담그는 곳뿐만 아니라 
통로의 역할도 해서 파묵칼레 입구에서 걸어올라갈수도, 반대로 걸어 내려갈 수도 있다.
파묵깔레는 석회층으로 인해 만들어진 환상적인 경관과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의 풍부한 볼거리가 절묘하게 조합된 곳이다.
터키여행의 백미는 파묵칼레 관광이다. 
 

​히에로폴리스 박물관 바로 아래에서 본 파묵칼레의 풍경











왼쪽으로 이어진 얕은 연못이나 수로에서 미지근한 야외온천을 할 수 있다. 





수로에 흐르는 미지근한 온천수는 여행의 피로를 풀어준다.

파묵칼레 아래 온천수가 모이는 연못에서 바라본 풍경






온천수가 모여서 만들어진 연못에 보트 등 여러 위락시설이 있어 즐길 수 있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파묵칼레 인근 마을에 있는 빌라식 호텔




호텔 부속 야외온천과 풀장






호텔 부근의 재래시장-값이 싸고 물건들도 다양하다.


 
호텔에서 만난 길냥이들 -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 에페소 사도요한교회   2014. 6. 30. 12:57


에페소스 (라틴어: Ephesus 터키어: Efes,)

 

에페소스 (라틴어: Ephesus 터키어: Efes,) 공동번역성서에서는 에페소)는 서부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에 (현재의 터키) 위치한, BC 1500 - 1000 년 사이에 처음 건설되어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7-6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다.

 에페소스는 주변 도시 혹은 국가, 스파르타페르시아페르가몬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화 되는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식민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페소스는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6세기에 건조된 웅대한 아르테미스 신전과 로마 제국시대에 건조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 도미티아누스신전 (기원후 1세기)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아르테미스는 기독교가 들어오기전 에페소인들에게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받던 대상이어서, 루가에 따르면 사도 바오로가 선교를 할 때 

은으로 만든 신전모형을 팔던 상인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도 바오로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자고 설교하여, 

사람들이 신전모형을 더이상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페소스는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오로가 전도와 사목을 한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 교회였다. 

또한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7개의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교회일 정도로 1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비중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국 성공회의 폭스 신부가 쓴 《순교자》에 따르면 사도 성 바오로의 

제자인 디모테오가 주교로 사목한 교회가 에페소 교회라고 한다.

사도 요한교회



37-42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선교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 받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에페소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냈다. 


또한 사도 바오로도 그의 2, 3차 전도 여행에 에페소를 방문하여 


선교를 하면서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64년 사도 바오로가 로마의 성밖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 에페소 교인들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에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지중해 연안 의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되어 


이곳에서 대리석을 채취하는 중노동을 하면서 "요한묵시록"을 쓰게 된다. 


그 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피살되자 유배에서 풀려나 


에페소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썼다.  


셀축(Selcuk)지역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셀축성이 보이며


 바로 조금만 들어가면 교회가 나온다. 


아야소룩 언덕에는 성 소피아를 세운바 있는 유스티니아누스(527∼565년 재위)


 황제가 건축한 요한 교회(The Church of St. John)가 있다. 


4세기에는 그곳에 요한의 무덤이 있었고 작은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도 요한 무덤 교회는 6개의 돔과 130m의 길이 십자가 모형의 설계, 


또 대리석의 일부는 무너진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가져 왔다고 한다.

티니아누스 황제는 십자가형으로 교회를 건축했는데 특


히 복음서의 제자들을 상징하는 네 개의 기둥과 상석에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기둥을 사용하였다. 


교회에는 요한의 무덤, 헌금저장소, 성화가 있는 방, 성찬을 준비하는 방, 


례소 등이 있다. 


요한 교회 뒤쪽에는 셀죽성이 있고 그 밑에는 이사베이 회교 사원이 있다. 


이사베이 회교 사원은 1375년에 건축된 전형적인 회교 건물이다. 


본래는 두 개의 첨탑이 있었는데 17세기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문 입구를 장식하던 트로이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조각은 여


기서 훔쳐져서 영국 런던의 WOBBURN ABBEY교회에 있다. 


묘지실의 대리석 석관도 성물로 여겨진다. 


묘지에서 나온 먼지는 현지인들에게 


만나로 여겨져서 병을 치료하는데 사용됐다고 한다.


<사도요한교회의 입구>







<교회 북쪽에 위치한 아야술룩 언덕의 셀축 성채>






이사베이 회교 사원의 첨탑--본래 2개였으나 하나는 지진으로 무너졌다.



<제대 유적에서 바라본 사도 요한성당 전체 모습> 









복음서의 제자들을 상징하는 네 개의 기둥과 상석에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기둥을 사용하였다. 





<세례터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


 





<성 요한성당의 복원모형과 현재 폐허가 된 모습>





성 요한성당의 출입구 유적



<사도요한성당의 신자석>

 

<제대와 성당 신자석 중간 중앙 돔 아래 위치한 사도요한의 무덤>



<사도요한의 무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 필라델피아   2014. 6. 29. 15:31

필라델피아 교회 유적

사르디스(지금의 사르트) 동남쪽 45km 지점에 

옛날의 필라델피아(현재 알라쉐히르)가 있다. 

요한묵시록에서 그리스도는 7교회 중 스미르나와 필라델피아 교회만은 

나무라지 않으시고 필라델피아 교회만은 오히려 칭찬하셨다.

유적으로는 베쉬 에일뤨지구 장터에 사도 요한 성당의 거대한 벽돌기둥만 남아있다. 

유적으로 봐서 성당의 규모가 어마어마 했을거라는 추론이 나온다. ​

 


 사도 요한 성당의 출입문이었던 거대한 벽돌기둥






출입문과 기둥의 잔해 일부만 남아있은 사도 요한 성당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콘야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콘야의 약사

콘야와 그 주변은 기원전 7천년 선사시대로부터 알려진 하나의 인류 정착 거주지로  구석기신석기청동기 그리고 철기시대에 속한 아주 많은 유적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글씨가 기원전 35백년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라면 콘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착지들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콘야의 경계안에 있는 차탈휴육은 세계에서 첫번째로 농업을 사용했으며 야생동물의 공격에서 공동으로 방어하며 불을 첫번째로 사용했으며 인류의 첫 정착거주생활과 음식문화등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던 중심지로 추측되어진다.

콘야는 항상 문명의 중심지가 되어 왔는데, 히타이트리디야는 BC 6백년대 페르스는 BC 4백년대알렉산더대왕베르가마 왕정은 BC 2백년대로마는 AD 395년에 콘야와 그 주변을 통치했다.

7세기 초 사산왕조가 곧 같은 7세기 중반 무아비에의 명령에 에메비가 콘야를 일시적으로 점령했다. 10세기에까지 비잔틴의 도가 된 코냐는 아랍회교도인에 의한 공격당하고 말라즈기르트 전투보다 먼저 코냐에 온(1069) 터키 공격자들에 의해 셀축시대가 되었다.

대셀축제국의 왕 알파르스란(Alparslan) 1071년 터키민족에게 아나돌루의 문을 열어주었다알파르스란왕은 승리후 사령관에게 아나돌루를 완전히 정복할 직책을 주었다그리고 콘야는 슐레이만 샤흐에 의해 정복되었다그후 슐레이만 샤흐는 콘야를 정복하면서 서쪽을 통치하고 중심지로 이즈닉을 선택하여 아나돌루 셀축 정부가 1074년 세워졌다정복과 함께 코냐에 터키-이슬람 시대가 시작되었다.

1097년 제십자군 전쟁에 의해 이즈닉을 점령당한 후 수도를 콘야로 옮겨 역사에 새로운 한 장을 더 연 콘야는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건축 유적과 장식 그리고 짧은 기간 아나돌루의 가장 번영하는 도시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에 독일제국의 바르바르로사(F. Barbarossa)가 콘야를 포위하였으나 클르차르스란 2세의 수비에 성이 빼앗기지 않았고 5일 후 공격을 포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셀축시대가 몰락하기까지(1308)  콘야는 수도로 계속되었고 그후 카라만올루 봉건제국의 가장 큰 도시로 카라만봉건제국의 경영지가 되었다.

콘야 1467년 오스만 영토에 포함되었고 현재는 터키공화국의 가장 큰 그리고 중요한 도시중의 하나로 화려한 과거와 미래로 가는 길에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콘야의 바오로 기념 성당에서의 미사 봉헌

 


























콘야 시와 트램의 모습



<콘야에서 안티오키아 가는 길에 있는 넓은 호수인 에이르디르 호수>





<아편의 원료인 양귀비를 재배하는 농지>

안티오키아(라틴어: Antiochia), 

 

안타키아 터키 남부 하타이 의 중심지로 하타이 주의 주도(州都)로, 


안티오크(영어: Antioch), 안디옥, 안티오키아(라틴어: Antiochia), 


안티오케이아(그리스어: Αντιόχεια)라고도 불렸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계의 셀레우코스 왕조에 의해 안티오케이아가 건설되어 


알렉산드레이아와 함께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초기 기독교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중요한'

 

5개의 총대주교좌가 있는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안타키아는 터키 남부 오론테스  동안에 위치한 도시로 


터키와 시리아의 국경 근처에 있으며, 지중해로부터 약 22km 정도


 내륙으로 들어가 있으며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덥고 건조하다.

 

농업이 중요한 산물로 근처의 비옥한 아미크 평원에서 집약적인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어 가까운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 관련 산업이

 

현재 안타크야의 경제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밀, 목화, 포도, 올리브 등이다.


기원전 323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고 그의 뒤를 이은 후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셀레우코스 1 셀레우코스 제국을 세워 


 안티오케이아를 그 왕국의 중심도시로 정했다. 


그 후로 이 도시는 계속 셀레우코스 제국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으며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성장하였고

 

로마, 알렉산드레이아에 이어 당시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기원전 64 로마에 편입되었고 시리아 속주의 주도가 되어,  계속 발전했다. 


특히 초기 기독교 때 선교와 신학 교육의 중심지로 크게 이름을 날렸는데

 

사도 는 이곳을 중심으로 독교 전파에 힘썼다. 


 동로마 시대에도 중요한 도시로 발전해 기독교 5 총대주교구 중 하나가 되었다.

 

안티오케이아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레이아의 기독교 학파와는 달리 인성(人性)을 중요시 여겼다.


 동방 교회 교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도 이 도시 출신의 신학자이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의 국력이 약해지자 안티오케이아는 


두 번에 걸쳐 페르시아 제국에게 넘어갔다가 


637 이후 아랍계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슬람의 지배를 받은 이후부터는 예전의 번영을 잃고 작은 중소도시로 전락했다. 


969 비잔티움 제국 황제 니케포로스 2가 이 도시를 다시 탈환하여 


제국의 변경 요새로 삼았다.


1084에는 당시 소아시아를 휩쓴 셀주크 투르크에 점령되었다가 


1098 제1 십자군 원정 당시 십자군이 이 도시를 점령하여

 

안티오키아 공국을 세워 2세기에 걸쳐 라틴계 로마 가톨릭 독립국가로 존재했으나 


1268 시리아  이집트를 손에 넣은 맘루크 왕조의 침입으로 무너졌고


 안티오크는 다시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1517 오스만 제국이 안티오키아를 차지한 후 제1 세계대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오늘날에는 터키의 도시가 되었다.

 

 

바오로 기념성당 유적











<네개의 돌기둥 문의 초석만 남아 있는 입구.>

 

 

 

 

<폐허가 된 원형 극장>



<정교하게 조각된 대리석 파편들이 옛 영화만을 전한다.>
 





바오로 기념성당 유적

유대교 회당 자리었던 곳에 성당을 세운 특별한 사례인 비잔틴 시대에 지은

바오로 대성당의 초석이 남아 있는데, 대성당을 건축하기 전에 작은 성당이 있었음을

이곳 주교 옵티모스(357 - 381)의 명패 모자이크 두개가 발견으로 ​입증되었다.




 

 

 



<세례터>



<대성당의 대리석 초석>

 


<대성당의 강단 유적>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로마제국 제3의 도시였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시작된 그리스도 공동체는 4세기경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제3의 총대주교좌가 되었다.

스테파노 순교 후 예루살렘에서 축출된 헬레니스트가

주축이 되어 설립되었으며

 베드로 사도가 초대 주교라고 전승되고 있다.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가기 위해 이스탄불에서 2시간의 비행끝에

아다나를 거친 후 버스로 3시간 이상 이동하였다.


<쇠고기 석쇠구이 같은 케밥 터키 전통음식으로 점심 식사를 도로 휴게소 레스토랑>




안티오키아 시가지 안의 복잡한 골목에 있는 오래된 작은 성당에서 순례여행 첫미사봉헌









안티오키아 시가지와 뒷산



지금은 보수작업 중인 베드로 석굴성당이 있다는 안티오키아 뒷산

<비옥하고 광활한 평야가 많은 터키는 질좋은 농축산물 생산량이 많다고 한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 아르테미스 신전, 티아티라


아르테미스 신전

 

아르테미스 신전은 기원전 200년에 비잔티움의 필론에 의해 건설된, 

세계의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다.

 

고대에 가장 훌륭한 신전인, 아르테미스 신전은 다이아나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한때 그리스 문명과 고대 그리스 문화의 가장 웅장한 업적으로서 있었다.


이 신전은 사냥의 신이고, 자연의 여왕이며,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신이며 

아폴로의 쌍둥이 남매인 아르테미스 신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현재의 터키인 에페수스에 위치해 있었다. 

에페수스는 소아시아의 가장 부유한 항구도시였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127개의 대리석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기둥 하나가 20미터(60피트)에 달했다. 

신전 건설은 리디아의 크로이소스에 의해 시작된 120년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기원전 6세기에 처음 지어졌다가, 

200년 후에 불에 타버리고 이후 알렉산더 대왕의 감독 하에 복원되었다. 

그러나 그 위대한 신전은 골트 유목민의 침략, 지진과 약탈자들에 의해 

조금씩 파괴되었다.

오늘날, 몇 개의 대리석 기둥과 파괴된 잔해만이 

영광스러웠던 신전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신전 맞은편 자연적으로 잘 다듬어진 거대한 암벽산>


<신전 가는 입구에 늘어서 있는 석관들>

신전의 전경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이 잘린채로 서 있는 폐허가 된 신전>


부드러운 원형 조각의 석주 기단부  


<그나마 온전히 서 있는 20m 높이의 대리석 기둥 2개와 위가 잘라진 석주들 

상부의 이오니아식 조각솜씨



<제단이었던 벽돌 건물의 잔해>



 <자리를 찾지 못한 잔해가 땅에 널부러져 있다>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다듬은 기둥이 아무렇게나 나 뒹굴고.......> 



알맞은 크기의 돌로 쌓아올린 돌기둥 --지진에 무너지기 쉬운 건축


티아티라 (현재명 아크히사)


교통 요지에 위치하고 있는 현재명 아크히사는 B.C. 7세기 경에는 

리디아(Lydia)인들이  거주하며 펠로피아(pelppia)라 불렸다.

B.C. 3세기경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인 SELEUCUS 는 이곳에 도시를 세우고

이곳 출생인 자기 딸 이름인 티아티라라 이름 붙이고 

상업과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 시켰으며,


한 때 로마와 동맹 관계에 있던 버가모 왕국의 지배 하에 있다가 로마의 속령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 시에는 요한묵시록의 일곱 교회 중의 하나가 있었으며 

음란과 방탕으로 하느님의 진노를 샀으나 크게 번성하였으며 

1425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티아티라는 지형상 훌륭한 요새라고는 할 수 없으나 

지리적으로 길고 넓은 골짜기 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중요한 군사적 요충이 될 수 밖에 없었고 많은 유대인들을 이주시켰기때문에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상술과 지리적 특성은 자연히 상업도시로 번성케 했으며,

이때 이미 상인조합(길드/Guild) 조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유적은 현재 Akhisar라는 도시 밑에 매몰되었고, 

단지 도시 한 모퉁이에 아폴로 신전과 회랑, 그리고 비잔틴 교회의 페허만 남아있다.


완전히 폐허로 변한 아폴로 신전과 회랑,  비잔틴 교회 잔해






 현재의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시가지

​차창 사진


<양옆에 드넓은 올리브 농원과 밀밭이 펼쳐지는 한적한 고속도로...> 




<도로 휴게소에서 맛있는 점심식사>



<인구 500만이 사는 대도시 이즈말 주변>



현재 시골이나 도시는 이슬람 사원이 공동체의 중심을 이룬다. 


터키 곳곳에는 같은 형태의 주택을 이룬 마을이 눈에 많이 띈다.




풍광 좋은 해안 언덕에 위치한 클라로스 호텔 빌라에서 숙식하다.


부속 방갈로에서 숙박하다.




< 해질 무렵 무지개가 뜨다.>

해안가 풍경​










' 14 터키,그리스 성지순례 

  -- 성지순례여행의 시작 출국, 이스탄불


14박 15일('14/06/02 - 06/16)간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수도회)

김성태 (토마) 신부님이 인솔하는

성지대표부 28차 성지순례단 32명이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여행길에 오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지상 모습이 신기할 때가 많다.



중동지방 사막지대인 모양









이스탄불 상공 -흰벽에 붉은지붕의 터키건물의 특징을 볼수 있다.





터키에서 성지순례단이 타고다닐 관광버스와 이스탄불에서 묵은 호텔




<호텔 바로 앞에 있는 이슬람 사원 

-- 국민 98%가 이슬람교인인 터키에는  사원이 공동체의 중심이다.>



바오로의 탄생지 타르소스를 가기 위해 국내선 항공기를 타다.




해발 3000m를 넘는 타우루스(황소) 산맥의 만년설



비행기에서 본 터키의 어느 도시와 산지와 평야





가로가 잘 정비된 어느 도시의 
도로



<우리나라 포항처럼 철강도시인 이스켄데른시가 해안선을 따라 길게 뻗어있다.>



 이슬람 사원이 마을의 중심이다.o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라오디케아 ,콜로세


라오디케아

 

현재 ALAHSEHIR로 불리는 라오디게아는 예전에는 에페소와 수리아의 중간에

 위치하여 에게해에서 아시아의 중심으로 뻗어나간 로마의 길이 관통하는 도시로, 

파묵깔레에서 서쪽으로 6.5km, 빌라델비아에서 동남쪽으로 72km, 

에페소에서 남동쪽으로 160km정도 떨어진 

교통의 요지인 리커스 계곡에 위치하여 최고의 상업도시로 발전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는 몇번의 대지진을 격었는데,  

AD 17년 대지진으로 라오디게아가 모두 파괴되자 로마에서 도와주고자 했지만 

라오디게아는 이를 거절하고 순수 라오디게아인들의 힘만으로 도시를 재건했다. 

이 정도로 라오디게아는 엄청난 부를 갖춘 도시였다. 
이런 부의 근본이 된 것은 물론 무역과 통신이었지만 

기간 산업인 양모와 목화 또한 주축이 되었다. 

이 지역의 양모는 광택이 나는 검은색 양모로서 가격이 높았으며 인기가 좋았다. 

이들의 부는 로마의 키케로가 거액의 신용장을 라오디게아에서 현금화 했다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라오디게아는 의학이 발전했었다. 

이 곳의 눈병 치료약은 매우 뛰어나서 많은 이들이 찾았는데

 "브루기아가루'라 불린 이 안약 때문에 

라오디게아는 의료 도시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발전한 의학은 유명한 의학교가 뒷받침을 해 줬으며 

치료의 신 멘카루의 신전 주위에서 거의 모든 약품둘이 거래 되었다. 

이렇듯 엄청난 부를 가진 라디오게아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다. 

그래서 종교적 핍박이 그렇게 심하지도 않고 

경제적 궁핍도 없는 상황에서 포교 활동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렇듯 경제적인 부유함은 사람들에게 교회와 하느님을 간구할 필요성을 

못 느끼게 해 하느님에게 덥지도 차지도 않다하여 질타 받게 된다. 

이 질타는 라오디게아에서 6.5KM 정도 떨어진 히에라볼리에서 

온천수를 수로로 가져오면서 식은 미지근한 물에 비유하여 

오디게아인들을 질타했다고도 풀이된다. 

이렇듯 부유했던 라오디게아는 몇 차례의 대규모 지진으로 

현재의 유적지도 모두 땅속으로 함몰되어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이

 돌로 포장된 곧은 길과 시가지 건물들의 잔해,

교회 터로 볼 수 있는 유적 하나와 야외극장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라오디케아 유적 안내판과 유적지 입구


<유적지의 중앙도로 마차바퀴에 의해 바위가 움푹 파인 자국이 선명하다>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유적 복원작업 중이나 진척이 별로 없단다.>





철저하게 파괴되어 돌기둥들만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폐허 뿐인 라디오케아



<성당터 임을 증명하는 십자가가 새겨진 바위와 제단> 


<규모는 크나 거의 허물어진 원형극장>




                                                             로세

소아시아의 부르기아 서남쪽에 있던 성읍. 라오디케아, 히에라폴리스와 함께 

소아시아에서 시리아로 가는 동서 교통의 요지로, 한때 번영을 누렸으나 

신약시대에는 쇠퇴하였다.

바오로의 제자이자 동역자인 에파프라스가 골로새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후 몇차례의 대지진으로 도시 자체가 완전히 함몰되어

 지금은 흙이 쌓인 언덕에 유적지 안내판만 세워져 있다. 





지진의 흔적과 이름모를 식물의 꽃이 순례자들을 반긴다





현재의 콜로세 유적지 부근의 풍경 -- 제법 큰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아르테미스신전과 티아티라  

  

아르테미스 신전


 

아르테미스 신전은 기원전 200년에 비잔티움의 필론에 의해 건설된, 

세계의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다.

 

고대에 가장 훌륭한 신전인, 아르테미스 신전은 다이아나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한때 그리스 문명과 고대 그리스 문화의 가장 웅장한 업적으로서 있었다.


이 신전은 사냥의 신이고, 자연의 여왕이며,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신이며 

아폴로의 쌍둥이 남매인 아르테미스 신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현재의 터키인 에페수스에 위치해 있었다. 

에페수스는 소아시아의 가장 부유한 항구도시였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127개의 대리석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기둥 하나가 20미터(60피트)에 달했다. 

신전 건설은 리디아의 크로이소스에 의해 시작된 120년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기원전 6세기에 처음 지어졌다가, 

200년 후에 불에 타버리고 이후 알렉산더 대왕의 감독 하에 복원되었다. 

그러나 그 위대한 신전은 골트 유목민의 침략, 지진과 약탈자들에 의해 

조금씩 파괴되었다.

오늘날, 몇 개의 대리석 기둥과 파괴된 잔해만이 

영광스러웠던 신전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신전 맞은편 자연적으로 잘 다듬어진 바위산>
 

 



<신전 가는 입구에 늘어서 있는 석관들>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이 잘린채로 서 있는 폐허가 된 신전>





<그나마 온전히 서 있는 대리석 기둥 상부의 이오니아식 조각솜씨>











<상부가 질린 돌기둥들이 땅위에 자리잡고.........>





<제단이었던 벽돌 건물의 잔해>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다듬은 기둥이 아무렇게나 나 뒹굴고.......> 


 <자리를 찾지 못한 잔해가 널부러져 있다>


티아티라 (현재명 아크히사)


교통 요지에 위치하고 있는 현재명 아크히사는 B.C. 7세기 경에는 

리디아(Lydia)인들이  거주하며 펠로피아(pelppia)라 불렸다.

B.C. 3세기경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인 SELEUCUS 는 이곳에 도시를 세우고

이곳 출생인 자기 딸 이름인 티아티라라 이름 붙이고 

상업과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 시켰으며,


한 때 로마와 동맹 관계에 있던 버가모 왕국의 지배 하에 있다가 로마의 속령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 시에는 요한묵시록의 일곱 교회 중의 하나가 있었으며 

음란과 방탕으로 하느님의 진노를 샀으나 크게 번성하였으며 

1425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티아티라는 지형상 훌륭한 요새라고는 할 수 없으나 

지리적으로 길고 넓은 골짜기 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중요한 군사적 요충이 될 수 밖에 없었고 많은 유대인들을 이주시켰기때문에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상술과 지리적 특성은 자연히 상업도시로 번성케 했으며,

이때 이미 상인조합(길드/Guild) 조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유적은 현재 Akhisar라는 도시 밑에 매몰되었고, 

단지 도시 한 모퉁이에 아폴로 신전과 회랑, 그리고 비잔틴 교회의 페허만 남아있다.


 



 현재의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시가지

​차창 사진
<양옆에 드넓은 올리브 농원과 밀밭이 펼쳐지는 한적한 고속도로...> 


<도로 휴게소에서 맛있는 점심식사>




<인구 500만이 사는 도시 이즈말 주변>



현재 시골이나 도시는 이슬람 사원이 공동체의 중심을 이룬다. 
 

터키 곳곳에는 같은 형태의 주택을 이룬 마을이 눈에 많이 띈다.

풍광 좋은 해안 언덕에 위치한 클라로스 호텔 빌라에서 숙식하다.



< 해질 무렵 무지개가 뜨다.>

해안가 풍경​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 필라델피

 

필라델피아 교회 유적


사르디스(지금의 사르트) 동남쪽 45km 지점에 

옛날의 필라델피아(지금의 알라쉐히르)가 있다. 

요한묵시록에서 그리스도는 7교회 중 스미르나와 필라델피아 교회만은 

나무라지 않으시고 필라델피아 교회만은 오히려 칭찬하셨다.

유적으로는 베쉬 에일뤨지구 장터에 사도 요한 성당의 

거대한 붉은 벽돌 기둥만 남아 있다. 

유적으로 봐서 성당의 규모가 어마어마 했을거라는 추론이 나온다. ​

 




성당의 아치형 출입문의 잔해 --규모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유적지 군데군데에 그리스 정교도들의 석관과 묘비들이 널려 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교회 기둥의 잔해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라오디케아 ,콜로세

라오디케아

 

현재 ALAHSEHIR로 불리는 라오디게아는 예전에는 에페소와 수리아의 중간에

 위치하여 에게해에서 아시아의 중심으로 뻗어나간 로마의 길이 관통하는 도시로, 

파묵깔레에서 서쪽으로 6.5km, 빌라델비아에서 동남쪽으로 72km, 

에페소에서 남동쪽으로 160km정도 떨어진 

교통의 요지인 리커스 계곡에 위치하여 최고의 상업도시로 발전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는 몇번의 대지진을 격었는데,  

AD 17년 대지진으로 라오디게아가 모두 파괴되자 로마에서 도와주고자 했지만 

라오디게아는 이를 거절하고 순수 라오디게아인들의 힘만으로 도시를 재건했다. 

이 정도로 라오디게아는 엄청난 부를 갖춘 도시였다. 
이런 부의 근본이 된 것은 물론 무역과 통신이었지만 

기간 산업인 양모와 목화 또한 주축이 되었다. 

이 지역의 양모는 광택이 나는 검은색 양모로서 가격이 높았으며 인기가 좋았다. 

이들의 부는 로마의 키케로가 거액의 신용장을 라오디게아에서 현금화 했다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라오디게아는 의학이 발전했었다. 

이 곳의 눈병 치료약은 매우 뛰어나서 많은 이들이 찾았는데

 "브루기아가루'라 불린 이 안약 때문에 

라오디게아는 의료 도시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발전한 의학은 유명한 의학교가 뒷받침을 해 줬으며 

치료의 신 멘카루의 신전 주위에서 거의 모든 약품둘이 거래 되었다. 

이렇듯 엄청난 부를 가진 라디오게아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다. 

그래서 종교적 핍박이 그렇게 심하지도 않고 

경제적 궁핍도 없는 상황에서 포교 활동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렇듯 경제적인 부유함은 사람들에게 교회와 하느님을 간구할 필요성을 

못 느끼게 해 하느님에게 덥지도 차지도 않다하여 질타 받게 된다. 

이 질타는 라오디게아에서 6.5KM 정도 떨어진 히에라볼리에서 

온천수를 수로로 가져오면서 식은 미지근한 물에 비유하여 

오디게아인들을 질타했다고도 풀이된다. 

이렇듯 부유했던 라오디게아는 몇 차례의 대규모 지진으로 

현재의 유적지도 모두 땅속으로 함몰되어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이

 돌로 포장된 곧은 길과 시가지 건물들의 잔해,

교회 터로 볼 수 있는 유적 하나와 야외극장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라오디케아 유적 안내판과 유적지 입구



<유적지의 중앙도로 마차바퀴에 의해 바위가 움푹 파인 자국이 선명하다>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유적 복구작업 중이나 진척이 별로 없단다.>

 



















<성당터 임을 증명하는 십자가가 새겨진 바위와 제단> 




<규모는 크나 거의 허물어진 원형극장>









 
 
                                                             로세

소아시아의 부르기아 서남쪽에 있던 성읍. 라오디케아, 히에라폴리스와 함께 

소아시아에서 시리아로 가는 동서 교통의 요지로, 한때 번영을 누렸으나 

신약시대에는 쇠퇴하였다.

바오로의 제자이자 동역자인 에파프라스가 골로새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후 몇차례의 대지진으로 도시 자체가 완전히 함몰되어

 지금은 흙이 쌓인 언덕에 유적지 안내판만 세워져 있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파묵칼레  

파묵칼레(Pamukkale)

 

파묵칼레(Pamukkale)는 터키 남서부 데니즐리에 위치한 석회붕을 말한다. 파묵칼레의 뜻은 터키어로 파묵이 목화를 뜻하고 칼레는 을 뜻하므로 '목화성'이란 뜻이다

 

 파묵깔레의 석회층은 자연이 만들어 낸 경이로운 산물로, 대지 상부에서 흘러 내려온 석회 성분을 포함한 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결정체를 만들고 이것들이 점차적으로 쌓여져서 현재의 광활하고 희귀한 경관을 만들어 낸 것이다. 딱딱해진 광활한 하얀 석회층의 패인 곳에 상부쪽에서 흘러내려온 온천수가 맑은 날에는 푸른 색을 띠는 장관을 연출하며 담겨 야외 온천을 만들기도 한다.  

 파묵칼레 전체에서 발을 담글 수 있는 곳은 온천수로이거나 왼쪽의 계단식 얕은 연못 정도다. 물 온도는 미지근한 정도로 얕은 곳은 좀 차갑기도 하다. 맨발로 미끈미끈한 석회층을 밟아보거나 석회 반죽(?)을 발로 짓이겨 보는 등 재미있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이곳은 단순히 발 담그는 곳뿐만 아니라 통로의 역할도 해서 파묵칼레 입구에서 걸어올라갈수도, 반대로 걸어 내려갈 수도 있다.
파묵깔레는 석회층으로 인해 만들어진 환상적인 경관과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의 풍부한 볼거리가 절묘하게 조합된 곳이다.
터키여행의 백미는 파묵칼레 관광이다. 
 

​히에로폴리스 박물관 바로 아래에서 본 파묵칼레의 풍관












왼쪽으로 이어진 얕은 연못이나 수로에서 미지근한 야외온천을 할 수 있다. 





파묵칼레 아래 온천수가 모이는 연못에서 바라본 풍경










 
하룻밤을 머물렀던 파묵칼레 인근 마을에 있는 빌라식 호텔




호텔 부속 야외온천과 풀장






호텔 부근의 재래시장-값이 싸고 물건들도 다양하다.


 
호텔에서 만난 길냥이들 -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히에라폴리스 [ Hierapolis ]  

 

 

히에라폴리스 [ Hierapolis ]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3세기에는 시리아 왕의 지배에 있었으나 기원전 2세기 말에는 버가모 왕국의 지배에 있었다. 이 도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번창해나가다가 기원후 50년에 대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만 네로 황제때 재건되었다. 당시 히에라폴리스는 치료 휴양의 도시이자 상업의 도시였다.

히에라폴리스 도시는 한때 인구가 8만명에 이르렀으나 계속되는 지진, 아랍인의 침입, 셀주크 터키 군과 비잔틴 제국 군대 간의 전장이 되는 바람에 급격히 황폐해졌으며 12세기 이래 폐허로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시작된 발굴 작업으로 히에라폴리스 폐허는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히에라폴리스에는 2세기경에 건축된 1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극장이 있고, 온탕과 냉탕을 갖춘 로마 목욕탕이 있다. 현재는 로마 목욕탕의 일부가 복원되어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성문 밖 북쪽 1km 지점에는 1200개에 달하는 석관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히헤라폴리스 복원 조감도와 출입구 

 <히에라폴리스의 성곽과 성문>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




 

 

원형극장 무대 뒷편에서 본 풍경들
 




 

 

사도필립이 순교한 히에라폴리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부름을 받은 필립(Philip-말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은 영적으로 우둔하여 실수도 많이 하였으나,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필립은 열심으로 복음을 전파하다가 히에라폴리스에서 순교하여 아래 사진의 무덤에 묻혔다고 한다


<성 필립보의 무덤>
 

로마식 목욕탕을 개조하여 만든 히에라폴리스박물관






 

박물관 앞의 폐허가 된 유적지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콘야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콘야의 약사

콘야와 그 주변은 기원전 7천년 선사시대로부터 알려진 하나의 인류 정착 거주지로  구석기신석기청동기 그리고 철기시대에 속한 아주 많은 유적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글씨가 기원전 35백년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라면 콘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착지들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콘야의 경계안에 있는 차탈휴육은 세계에서 첫번째로 농업을 사용했으며 야생동물의 공격에서 공동으로 방어하며 불을 첫번째로 사용했으며 인류의 첫 정착거주생활과 음식문화등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던 중심지로 추측되어진다.

콘야는 항상 문명의 중심지가 되어 왔는데, 히타이트리디야는 BC 6백년대 페르스는 BC 4백년대알렉산더대왕베르가마 왕정은 BC 2백년대로마는 AD 395년에 콘야와 그 주변을 통치했다.

7세기 초 사산왕조가 곧 같은 7세기 중반 무아비에의 명령에 에메비가 콘야를 일시적으로 점령했다. 10세기에까지 비잔틴의 도가 된 코냐는 아랍회교도인에 의한 공격당하고 말라즈기르트 전투보다 먼저 코냐에 온(1069) 터키 공격자들에 의해 셀축시대가 되었다.

대셀축제국의 왕 알파르스란(Alparslan) 1071년 터키민족에게 아나돌루의 문을 열어주었다알파르스란왕은 승리후 사령관에게 아나돌루를 완전히 정복할 직책을 주었다그리고 콘야는 슐레이만 샤흐에 의해 정복되었다그후 슐레이만 샤흐는 콘야를 정복하면서 서쪽을 통치하고 중심지로 이즈닉을 선택하여 아나돌루 셀축 정부가 1074년 세워졌다정복과 함께 코냐에 터키-이슬람 시대가 시작되었다.

1097년 제십자군 전쟁에 의해 이즈닉을 점령당한 후 수도를 콘야로 옮겨 역사에 새로운 한 장을 더 연 콘야는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건축 유적과 장식 그리고 짧은 기간 아나돌루의 가장 번영하는 도시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에 독일제국의 바르바르로사(F. Barbarossa)가 콘야를 포위하였으나 클르차르스란 2세의 수비에 성이 빼앗기지 않았고 5일 후 공격을 포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셀축시대가 몰락하기까지(1308)  콘야는 수도로 계속되었고 그후 카라만올루 봉건제국의 가장 큰 도시로 카라만봉건제국의 경영지가 되었다.

콘야 1467년 오스만 영토에 포함되었고 현재는 터키공화국의 가장 큰 그리고 중요한 도시중의 하나로 화려한 과거와 미래로 가는 길에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콘야의 바오로 기념 성당에서의 미사 봉헌

 






























<콘야에서 안티오키아 가는 길에 있는 넓은 호수인 에이르디르 호수>





<아편의 원료인 양귀비를 재배하는 농지>

안티오키아(라틴어: Antiochia), 

 

안타키아(터키어: Antakya, 아랍어: انطاكية, 그리스어: Αντιόχεια, 라틴어: Antiochia ad Orontem) 터키 남부 하타이 의 중심지로 하타이 주의 주도(州都)이다. 안티오크(영어: Antioch), 안디옥, 안티오키아(라틴어: Antiochia), 안티오케이아(그리스어: Αντιόχεια)라고도 불렸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계의 셀레우코스 왕조에 의해 안티오케이아가 건설되어 알렉산드레이아와 함께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초기 기독교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중요한 5개의 총대주교좌가 있는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안타키아는 터키 남부 오론테스  동안에 위치한 도시로 터키와 시리아의 국경 근처에 있다.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약 22km 정도 내륙으로 들어가 있으며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덥고 건조하다. 농업이 중요한 산물로 근처의 비옥한 아미크 평원에서 집약적인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어 가까운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 관련 산업이 현재 안타크야의 경제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밀, 목화, 포도, 올리브 등이다.

기원전 323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고 그의 뒤를 이은 후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셀레우코스 1 셀레우코스 제국을 세웠고 안티오케이아를 그 왕국의 중심도시로 정했다. 그 후로 이 도시는 계속 셀레우코스 제국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으며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성장하였고 로마, 알렉산드레이아에 이어 당시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기원전 64 로마에 편입되었고 시리아 속주의 주도가 되었으며, 제정 시대에도 계속 발전하였다. 특히 초기 기독교 때 선교와 신학 교육의 중심지로 크게 이름을 날렸는데 사도 는 이곳을 중심으로 독교 전파에 힘썼다. 그 후 동로마 제국 시대에도 중요한 도시로 발전했으며 기독교의 중요한 5 총대주교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안티오케이아의 기독교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레이아의 기독교 학파와는 달리 인성(人性)을 중요시 여겼다. 동방 교회 교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도 이 도시 출신의 신학자이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의 국력이 약해지자 안티오케이아는 두 번에 걸쳐 페르시아 제국에게 넘어갔다가 637 이후 아랍계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슬람의 지배를 받은 이후부터는 예전의 번영을 잃고 작은 중소도시로 전락했다. 969 비잔티움 제국 황제 니케포로스 2가 이 도시를 다시 탈환하여 제국의 변경 요새로 삼았다.

1084에는 당시 소아시아를 휩쓴 셀주크 투르크에 점령되었다가 1098 제1 십자군 원정 당시 십자군이 이 도시를 점령하여 안티오키아 공국을 세웠다. 안티오키아 공국은 두 세기에 걸쳐 라틴계 로마 가톨릭 독립국가로 존재했으나 1268 시리아  이집트를 손에 넣은 맘루크 왕조의 침입으로 무너졌고 안티오크는 다시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1517 오스만 제국이 안티오키아를 차지한 후 제1 세계대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오늘날에는 터키의 도시가 되었다.

 

 

바오로 기념성당 유적











<네개의 돌기둥 문의 초석만 남아 있는 입구.>

 

 

 

 

<폐허가 된 원형 극장>



<정교하게 조각된 대리석 파편들이 옛 영화만을 전한다.>
 





바오로 기념성당 유적

유대교 회당 자리었던 곳에 성당을 세운 특별한 사례인 비잔틴 시대에 지은

바오로 대성당의 초석이 남아 있는데, 대성당을 건축하기 전에 작은 성당이 있었음을

이곳 주교 옵티모스(357 - 381)의 명패 모자이크 두개가 발견으로 ​입증되었다.




 

 

 



<세례터>



<대성당의 대리석 초석>

 


<대성당의 강단 유적>







 


콘야 에블라나박물관

콘야는 터키 중부 내륙 지역의 도시로써 옛날 셀축트루크의 수도였던 터키 주요 도시이다. 


그 옛날 비단길, 도자기의 길, 면화의 길, 향료의 길이라는 


다양한 이름의 길이 대부분 콘야를 거쳤을 만큼 교통의 요지이다. 


콘야는 메소포타미아문명의 발상지인 유프라테스강이 근처에 흘러 형성된 


인류 최초의 주거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콘야는 메블라나 루우미가 12세기에 창시한 이슬람 소수파인 

수피 교단 중 하나인 터키 이슬람 메블라나 교단의 본산지이다. 

메블라나는 유일신 알라와 만나기 위해서는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하며, 

금욕과 고행을 통한 끊임없는 기도생활을 해야 한다고 본 

다소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는 터키 특유의 이슬람이라 할 수 있다.

이 교단의 수피들은 매블래비(Mevlevi), 또는 소용돌이치는 수도승(The Whirling Dervish)이라고 

불리었는데, 교단의 수피들이 격렬한 행위를 하도록 하여 

그 절정을 이루게 함으로서 예배를 수행하는데서 Whirling Dervishes 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고, 

이 신비를 체험하는 방법으로 나온 것이 Whirling Dance 이다.

 남성 무용수, 원통형 모자, 하얀 윗도리, 둥근 치마, 침묵 속의 댄스로 요약되는 

The Whirling Dervish는 춤추는 자를 황홀의 경지로 이끌기에 충분해 보였다. 

이러한 특수한 수련 방식은 신비주의적 색채가 농후하다는 이유로 

정통 이슬람에서는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이슬람은 알라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도록 할 뿐 

개인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 

카파도키아 부근의 터키석 판매점





 

 

 

 

슐탄이 지어준 대상들의 숙소








 

 





<끝없는 고속도로를 달리다 혹간에 만나는 휴게소>
 

 

에블라나 박물관


메블라나 박물관은 콘야인들의 자랑이다. 박물관에는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를 창시한 메블라나의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원래 궁전의 장미 정원이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왕이 메블라나의 아버지 바하틴 벨레디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입구에서부터 가장 이색적으로 인상을 주는 푸른색 타일로 장식된 탑은 1396년에 세워진 것이다.

 터키 정부가 이곳을 박물관으로 개장한 것은 관은 1927년이다. 

The Whirling Dervish의 창시자인 메블라나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던 이 박물관은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The Whirling Dervish의 명성 때문에 

1년에 백만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온다고 한다.

내부 촬영이 엄격히 규제되어 아쉽다.































 Whirling Dance 를 추는 수피들의 사진

 

 

박물관의 아름다운 정원




 

 



<사도 바오로가 돌을 맞고 쫓겨난 산간벽지인 리스트라

--바위가 성벽처럼 둘러싸인 지형이 이채롭다.>


 

 

 

지중해 에게해에  위치한 안탈랴 크라운 플라자 호텔















 

 

 


 








 


 

 

카파도키아 괴레메

카파도키아에서 괴레메 여행의 시작점이 되는 괴레메 야외박물관

(Open Air Museum)은 4세기부터 이 지역의 독특한 기암괴석을

 

파내 만들어진 교회와 수도원이 모여있는 곳이다.

말 그대로 열려 있는 박물관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곳에서는 박해를 피해온 수도사들이 살던 집과 


30여 개가 넘는 교회들을 볼 수 있다.

 

교회마다 비잔틴의 영향을 받은 벽화를 볼 수

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훼손되었지만,


 동굴에 빛이 들어가지 않는 곳은 보존 상태가 좋은 벽화도 남아있다.

 

 

버섯바위들로 이루어진 지형을 지나 괴레메로 이동 증 촬영한 차창 사진들



 

 괴레메 언덕의 바위들의 속을 파내어 조성되어 있는 암굴 교회들


  

큰 바위들이 하나의 독립교회다




< 계곡의 교회들 창 옆에 3개의 구멍이 있는데 비둘기를 길러 단백질을 공급받고

비둘기 알은 벽화를 그리는 안료의 원료로 사용했다고 한다>
















카파도키아 전체를 전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비경

 

 

 

전망대 매점의 고양이




2014 터키,그리스 성지순례여행(4) --카파도키아​ 



카파토키아는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터키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활화산이었던 예르지예스산(3917m)이 화산 폭발로 흘러내린 용암이 오랜세월에 걸친

 풍화, 침식작용으로 부드럽고 쉽게 깍이는 응회암 지대로 바뀌었다.

지하도시인 데린구유와 같이 쉽게 노출되지 않아 종교탄압시기 기독교인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대표적인 버섯 바위와 기암속에 숨은 기독교 벽화들, 수십미터씩 파내려간
지하 도시등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노천 그 자체가 작품이다.

경기도 만큼 넓은 면적 전체에 볼거리가 흩어져 있어  

짧은 시간에 곳곳을  다 볼 수는  없어, 

열기구를 타고 높은곳으로 올라가 내려다 보는 투어가 있는데 

날씨 관계로 투어가 취소되어 못내 아쉬웠다.

 

아나톨리아 고원의 중심부에 자리한 대규모 기암지대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모양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신비스럽고 기이한 형태를 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바위들이

 산재해 있는 이 곳은 1985년 세계자연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산 중턱에 옛 교회의 잔재가 흩어져 있는가운데 이슬람 사원이 있다>



 이튿날 새벽 열기구를 타려고 했으나 기상악화로 기회를 놓친 아쉬움

열기구 타러 가는 길에 촬영한 차창 사진













<산세 자체가 오묘하여 신비스럽다.> 

기묘한 풍경이 경이로워  차 안에서 연신 셔터를 눌렀다.  


 괴레메에서 하룻밤을 숙식한 카파도키아 라마다 호텔>


커다란 바위를 파서 만든 암굴식당 출입구와 내부

---<암굴식당에서 맛있는 점심과 와인을 먹으니 분위기가 좋았다.>


 차로 이동하면서 감상한 경이로운 자연의 모습들......

차에서 내려 경이로운 모습에 넋을 놓고 촬영하다.

3위일체 바위 

풍화가 심한 아래 응회암에 비해 단단한 의 현무암이 마모되지 않아 마치 버섯처럼 생겼다. 

토끼 바위

​<육영수 여사 바위(?)>


괴레매 전망대에서 바라본 카파도키아

이튿날 새벽 열기구를 타려고 했으나 기상악화로 기회를 놓친 아쉬움





열기구 타러 가는 길에 촬영한 차창 사진




흰색 이암이 풍화작요으로 독특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적을 피해 주거지를 높은 바위산에 암굴을 파고 살았던 흔적들이 수 많다.



 

 
     
 
 



                                                                       수도교
                               로마시대부터 물을 끌어오기 위해 높은 성곽을 쌓고 수로를 만들었다







20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이스탄불 ->인천공항(여행 마무리) 



                         그랜드 바자르
비잔틴 시대부터 현재 그랜드 바자르가 있는 장소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후 터키가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서 1455-1461에 걸쳐 
그 곳에는 도시의 경제생활을 부강하게 만들 목적으로 
두 개의 주 아케이드가 만들어진 이후 사람들은 
활발한 상업활동을 위한 더 많은 장소를 필요로 하였고 
그 결과 주 아케이드의 바깥부분까지 그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오토만 시대를 거치면서 지진,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던 
이 곳은 몇 번에 걸친 복구 끝에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18개의 출입구와 4천개 이상의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는

 세계의 가장 큰 바자르 중의 하나로
 터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은 관광명소로 손 꼽히고 있다.

 







                                                          <그랜드 바자르의 액세사리 가게>


                                          <여행 마지막 날 양갈비 점심식사 >







                                                            트램바이
트램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선 교통수단으로 지상전철, 노면전차라고도
불리는 트램 Tramvay은 말그대로 승용차와 같이 지상을 다니는 전차다.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되며 접근도 쉽고 이동이 
가능한 두 량씩 짝지어진
4량의 차량이 
참 이색적이고 편리하게 궤도를 운행하며 교통신호도 똑 같이 따른다. 
 
이스탄불에서는 1872년부터 이용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아주 중요한 교통수단 중 하나로  이스탄불 시민과 여행자의 발이 되어주고 있다.



 





                         수도교
로마시대부터 물을 끌어오기 위해 높은 성곽을 쌓고 수로를 만들었다








                                        갈라타 타워 - GALATA KULESI
 이 타워는 6세기경 '그리스도의 탑'이라는 이름으로 
비잔틴 제국에 의해 건축되었던 것이나 14세기 제노아에서 이주해온 민족들이 
자신의 자치령에 따라 재건한 것으로 지역의 이름을 따라 갈라타 타워로 개명되었다.

오스만 제국시대이던 1446년에 타워의 상층부가 추가되면서 

그 모습은 급격히 변화하게 되었으며 시대가 흐르면서 
이 곳은 감옥, 화재감시탑, 해상감시탑 등 그 용도면에서도 다양하게 이용되어졌다. 

현재 갈라타 타워의 높이는 63미터로, 

가장 높은 곳의 두 층은 전통쇼를 가미한 레스토랑으로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한식당에서 정식으로 여행 마지막 밤 저녁 식사>





 

 
 

                 지하저수조(예레바탄 지하 궁전) 
건설에만 무려 7,000여 명의 노예가 동원되었던 지하 저수지인 
예레바탄 지하 궁전은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건설되었다. 


지하 궁전은 길이 143m,폭 65m,높이 9m에 달할 정도로 웅장한 크기를 자랑한다.
 항상 전장(戰場)이었던 이스탄불은 안정적인 물 공급이 필요하여 저수지를 많이 만들었다. 
이곳은 그 당시 저수지 중 규모가 가장 컸을 뿐만 아니라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저수지로 사용된 이곳이 지하 궁전이라 불리게 된 것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돌기둥 때문이다.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총 336개의 아름다운 대리석 기둥은 
각지의 신전으로부터 운반해 온 것들이다. 
1885년 이곳은 복원 공사를 거쳐 조명, 음향 시설 등을 설치하고
 여행객들을 위한 보도를 만들었다. 
이 시기 저수지에서는 거꾸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가 발견되었다.
 메두사가 거꾸로 놓인 이유는 
메두사의 눈과 마주치면 돌이 되어 버린다는 전설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지하 저수지들는 레스토랑, 콘서트 무대 등으로 사용되면서 
시내의 관광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이스탄불 오벨리스크

술탄아흐메트모스크 맞은편에는 비잔틴 시대에 전차경주를 하던 
원형경기장인 히포드럼 광장이 있다. 
이곳은 "U"자 형태의 큰 경기장이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고 
이집트 오벨리스크와 뱀기둥, 콘스탄틴기둥 분수대 등의 유적들만 남아있다. 
고대 도시의 심장부였던 굉장히 의미있는 곳이다.
10만명 정도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던 경기장이라니, 
그 규모가 감히 짐작되지 않는다. 
검투경기장이었다가 검투가 금지되고 대전차경기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거대한 오벨리스크와 뱀기둥이 있는 히포드럼(경기장)은 블루모스크 앞에 위치해 있다.


 
 
보스포러스 제1대교 야경


보스포러스 제1대교는 대륙과 대룩을 잇는 다리로 사람이 통행할 수 없도록
제한이 되어있으며 
1970년 착공해서 1973년 10월 23일  
터키공화국 수립 50주년에 맞춰 개통한 다리로 길이는 1560m이다.

이 다리가 사람들의 통행을 제한 시킨 이유는 다리위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로 금지시켰으며 우리나라의 인천대교와 
마찬가지로
운행 중 차에서 내랄 수 없도록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자살기록 4위를 기록한 이 다리에서는 2001년에 146명이 뛰어내려 24명이 사망, 
듬해에는 190명이 뛰어내려 이 가운데 38명이 목숨을 잃었다.  

                                               













                                                        에니 모스크의 야경







 
                                             

                                                            옛 성곽과 망루들의 모습










 
                                                        

                                                     가죽 옷 공장 패션 쑈


































 





                                                  <성지순례 여행 마지막 저녁식사>

 





                                          탑승하기 전의 이스탄불 국제공항에서




 





                                                  10여시간의 비행 끝에 인천공항에 안착하다.




 





                               
<15일간의 성지순례여행의 추억을 간직하고 아쉬운 작별의 시간....>





번 터키,그리스 성지순례 여행
사진정리 및 블로그 등재를 마무리 했다.
긴 일정에 순례한 곳이 많아 기억이 잘 나지 않고
내용도 정확하지 못한 것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이번 여행에서는 정감 넘치는 현지인들의 친절함과
양식이지만 대체로 입맛에 맞는 음식,
폐허가 됐지만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유적들과 문화재들,


유식하고 친절한 터키 가이드 이은경 아가다 씨와
그리스 가이드 조동규 목사님의 친절한 안내가
오랫까지 기억돨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부님이 집전하는 매일미사에 참례는 
성지순례 여행 원천의 힘을 부여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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