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 교회 유적

사르디스(지금의 사르트) 동남쪽 45km 지점에 옛날의 필라델피아(지금의 알라쉐히르)가 있다.

요한묵시록에서 그리스도는 7교회 중 스미르나와 필라델피아 교회만은 나무라지 않으시고

필라델피아 교회만은 오히려 칭찬하셨다.

 

유적으로는 베쉬 에일뤨지구 장터에 사도 요한 성당의 거대한 붉은 벽돌 기둥만 남아 있다.

유적으로 봐서 성당의 규모가 어마어마 했을거라는 추론이 나온다. ​









<유적지 군데군데에 그리스 정교도들의 석관과 묘비들이 널려 있다.>



 

  

라오디케아

 

현재 ALAHSEHIR로 불리는 라오디게아는 예전에는 에페소와 수리아의 중간에 위치하여

에게해에서 아시아의 중심으로 뻗어나간 로마의 길이 관통하는 도시로, 

파묵깔레에서 서쪽으로 6.5km, 빌라델비아에서 동남쪽으로 72km,

에페소에서 남동쪽으로 160km정도 떨어진 교통의 요지인 리커스 계곡에 위치하여

최고의 상업도시로 발전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는 몇번의 대지진을 격었는데,  AD 17년 대지진으로

라오디게아가 모두 파괴되자 로마에서 도와주고자 했지만

라오디게아는 이를 거절하고 순수 라오디게아인들의 힘만으로 도시를 재건했다.

이 정도로 라오디게아는 엄청난 부를 갖춘 도시였다.
이런 부의 근본이 된 것은 물론 무역과 통신이었지만 기간 산업인 양모와 목화 또한 주축이 되었다.

이 지역의 양모는 광택이 나는 검은색 양모로서 가격이 높았으며 인기가 좋았다.

이들의 부는 로마의 키케로가 거액의 신용장을

라오디게아에서 현금화 했다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라오디게아는 의학이 발전했었다. 이 곳의 눈병 치료약은 매우 뛰어나서

많은 이들이 찾았는데 "브루기아가루'라 불린 이 안약 때문에

라오디게아는 의료 도시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발전한 의학은 유명한 의학교가 뒷받침을 해 줬으며

치료의 신 멘카루의 신전 주위에서 거의 모든 약품둘이 거래 되었다.

이렇듯 엄청난 부를 가진 라디오게아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다.

그래서 종교적 핍박이 그렇게 심하지도 않고 경제적 궁핍도 없는 상황에서 포교 활동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렇듯 경제적인 부유함은 사람들에게 교회와 하느님을 간구할 필요성을 못 느끼게 해

하느님에게 덥지도 차지도 않다하여 질타 받게 된다.

이 질타는 라오디게아에서 6.5KM 정도 떨어진 히에라폴리스에서 온천수를 수로로 가져오면서

식은 미지근한 물에 비유하여 라오디게아인들을 질타했다고도 풀이된다.

이렇듯 부유했던 라오디게아는 몇 차례의 대규모 지진으로 현재의 유적지도

 모두 땅속으로 함몰되어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이 돌로 포장된 곧은 길과

시가지 건물들의 잔해,교회 터로 볼 수 있는 유적 하나와 야외극장 하나만  남아 있다.



 

 

                               <유적지의 중앙도로 마차바퀴에 의해 바위가 움푹 파인 자국이 선명하다>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유적 복구작업 중이나 진척이 별로 없단다.>                

 

















                                  <성당터 임을 증명하는 십자가 새겨진 바위와 제단>

                                                <규모는 크나 거의 허물어진 원형극장>









 

   로세

소아시아의 부르기아 서남쪽에 있던 성읍. 라오디케아, 히에라폴리스와 함께 소아시아에서 시리아로 가는 동서 교통의 요지로, 한때 번영을 누렸으나

신약시대에는 쇠퇴하였다.바울의 제자이자 동역자인 에파프라스

골로새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후 몇차례의 대지진으로 도시 자체가 완전히 함몰되어

 지금은 흙이 쌓인 언덕에 유적지 안내판만 세워져 있다. 


 

 
'

파묵칼레(Pamukkale)

파묵칼레(Pamukkale)는 터키 남서부 데니즐리에 위치한 석회붕을 말한다.

파묵칼레는 터키어로 파묵은 목화를,  칼레는 을 뜻하므로 '목화성'이란 뜻이다

 

 파묵깔레의 석회층은 자연이 만들어 낸 경이로운 산물로,

대지 상부에서 흘러 내려온 석회 성분을 포함한 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결정체를 만들고

이것들이 점차적으로 쌓여져서 현재의 광활하고 희귀한 경관을 만들어 낸 것이다.

딱딱해진 광활한 하얀 석회층의 패인 곳에 상부쪽에서 흘러내려온 온천수가

맑은 날에는 푸른 색을 띠는 장관을 연출하며 담겨 야외 온천을 만들기도 한다.  

 파묵칼레 전체에서 발을 담글 수 있는 곳은 온천수로이거나 왼쪽의 계단식 얕은 연못 정도다.

물 온도는 미지근한 정도로 얕은 곳은 좀 차갑기도 하다.

맨발로 미끈미끈한 석회층을 밟아보거나 석회 반죽(?)을 발로 짓이겨 보는 등

재미있는 체험을  할 수 있고   단순히 발 담그는 곳뿐만 아니라 통로의 역할도 해서

파묵칼레 입구에서 걸어올라갈수도, 반대로 걸어 내려갈 수도 있다.

파묵깔레는 석회층으로 인해 만들어진 환상적인 경관과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의 풍부한 볼거리가 절묘하게 조합된 곳이다.

터키여행의 백미는 파묵칼레 관광이다. 

 
 
                                  ​히에로폴리스 박물관 바로 아래에서 본 파묵칼레의 풍광












                               왼쪽으로 이어지는 얕은 연못이나 수로에서 미지근한 야외온천을 할 수 있다. 






                                     

파묵칼레 아래 온천수가 모이는 연못에서 바라본 풍경






                                     파묵칼레에서 내려온 물이 만든 연못에서는 보트도 탈수 있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파묵칼레 인근 마을에 있는 빌라식 호텔




                                                  호텔 부속 야외온천과 풀장






                                                   
                                 
                               호텔 부근의 재래시장-값이 싸고 물건들도 다양하다.
 
                                         호텔에서 만난 길냥이들 -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히에라폴리스 [ Hierapolis ]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3세기에는 시리아 왕의 지배에 있었으나

기원전 2세기 말에는 버가모 왕국의 지배에 있었다.

이 도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번창해나가다가

기원후 50년에 대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만 네로 황제때 재건되었다.

당시 히에라폴리스는 치료 휴양의 도시이자 상업의 도시였다.

히에라폴리스 도시는 한때 인구가 8만명에 이르렀으나 계속되는 지진,

아랍인의 침입, 셀주크 터키 군과 비잔틴 제국 군대 간의 전장이 되는 바람에

급격히 황폐해졌으며 12세기 이래 폐허로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시작된 발굴 작업으로 히에라폴리스 폐허는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히에라폴리스에는 2세기경에 건축된 1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극장이 있고,

온탕과 냉탕을 갖춘 로마 목욕탕이 있다.

현재는 로마 목욕탕의 일부가 복원되어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성문 밖 북쪽 1km 지점에는 1200개에 달하는 석관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히헤라폴리스 복원 조감도와 출입구 

                                                           <히에라폴리스의 성곽과 성문>

 


​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





                                                    

원형극장 무대 뒷편에서 본 풍경들



 

 

사도필립이 순교한 히에라폴리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부름을 받은 필립(Philip-말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은영적으로 우둔하여 실수도 많이 하였으나,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필립은 열심으로 복음을 전파하다가

히에라폴리스에서 순교하여 아래 사진의 무덤에 묻혔다고 한다

 

<성 필립의 무덤>
 

                                           로마식 목욕탕을 개조하여 만든 히에라폴리스박물관

 

 

박물관 앞의 폐허가 된 유적지



 

 







 

 

콘야의 약사

콘야와 그 주변은 기원전 7천년 선사시대로부터 알려진 하나의 인류 정착 거주지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그리고 철기시대에 속한 아주 많은 유적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글씨가 기원전 35백년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라면

콘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착지들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콘야의 경계안에 있는 차탈휴육은 세계에서 첫번째로 농업을 사용했으며

야생동물의 공격에서 공동으로 방어하며 불을 첫번째로 사용했으며 인류의 첫 정착거주생활과

음식문화등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던 중심지로 추측되어진다.

 

콘야는 항상 문명의 중심지가 되어 왔는데, 히타이트, 리디야는 BC 6백년대

페르스는 BC 4백년대, 알렉산더대왕, 베르가마 왕정은 BC 2백년대,

 로마는 AD 395년에 콘야와 그 주변을 통치했다.

7세기 초 사산왕조가 곧 같은 7세기 중반 무아비에의 명령에

에메비가 콘야를 일시적으로 점령했다.

10세기에까지 비잔틴의 도가 된 코냐는 아랍회교도인에 의한 공격당하고

말라즈기르트 전투보다 먼저 코냐에 온(1069) 터키 공격자들에 의해 셀축시대가 되었다.

대셀축제국의 왕 알파르스란(Alparslan) 1071년 터키민족에게 아나돌루의 문을 열어주었다. 

알파르스란왕은 승리후 사령관에게 아나돌루를 완전히 정복할 직책을 주었다. 

그리고 콘야는 슐레이만 샤흐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후 슐레이만 샤흐는 콘야를 정복하면서 서쪽을 통치하고 중심지로

이즈닉을 선택하여 아나돌루 셀축 정부가 1074년 세워졌다. 

정복과 함께 코냐에 터키-이슬람 시대가 시작되었다.

 

1097년 제1 십자군 전쟁에 의해 이즈닉을 점령당한 후 수도를 콘야로 옮겨 

역사에 새로운 한 장을 더 연 콘야는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건축 유적과 장식

그리고 짧은 기간 아나돌루의 가장 번영하는 도시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3 십자군 전쟁에 독일제국의 바르바르로사(F. Barbarossa)가 콘야를 포위하였으나

클르차르스란 2세의 수비에 성이 빼앗기지 않았고 

5일 후 공격을 포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셀축시대가 몰락하기까지(1308)  콘야는 수도로 계속되었고

그후 카라만올루 봉건제국의 가장 큰 도시로 카라만봉건제국의 경영지가 되었다.

콘야 1467년 오스만 영토에 포함되었고 현재는 터키공화국의 가장 큰  주요 도시중의 하나로

화려한 과거와 미래로 가는 길에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콘야의 바오로 기념 성당에서의 미사 봉헌





























                                <콘야에서 안티오키아 가는 길에 있는 넓은 호수인 에이르디르 호수>



                                     <아편의 원료인 양귀비를 재배하는 농지>

안티오키아(라틴어: Antiochia), 

 

안타오키아 터키 남부 하타이 의 중심지로 하타이 주의 주도(州都)이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계의 셀레우코스 왕조에 의해 안티오케이아가 건설되어 

알렉산드레이아와 함께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초기 기독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중요한 5개의 총대주교좌가 있는 도시 중 하나였다.

 

안타키아는 터키 남부 오론테스  동안에 위치한 도시로 터키와 시리아의 국경 근처에 있다.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약 22km 정도 내륙으로 들어가 있으며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덥고 건조하다. 

농업이 중요한 산물로 근처의 비옥한 아미크 평원에서 집약적인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어

가까운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 관련 산업이 현재 안타크야의 경제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밀, 목화, 포도, 올리브 등이다.

 

기원전 323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고 그의 뒤를 이은 후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셀레우코스 1 셀레우코스 제국을 세웠고 안티오케이아를 그 왕국의 중심도시로 정했다. 그 후로 이 도시는 계속 셀레우코스 제국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으며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성장하였고 로마, 알렉산드레이아에 이어 당시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기원전 64 로마에 편입되었고 시리아 속주의 주도가 되었으며, 제정 시대에도 계속 발전하였다.

특히 초기 기독교 때 선교와 신학 교육의 중심지로 크게 이름을 날렸는데 

사도 는 이곳을 중심으로 독교 전파에 힘썼다. 

그 후 동로마 제국 시대에도 중요한 도시로 발전했으며

기독교의 중요한 5 총대주교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안티오케이아의 기독교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레이아의 기독교 학파와는 달리 인성(人性)을 중요시 여겼다. 

동방 교회 교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도 이 도시 출신의 신학자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국력이 약해지자 안티오케이아는 두 번에 걸쳐 페르시아 제국에게 넘어갔다가

637 이후 아랍계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슬람의 지배를 받은 이후부터는 예전의 번영을 잃고 작은 중소도시로 전락했다. 

969 비잔티움 제국 황제 니케포로스 2가  탈환하여 제국의 변경 요새로 삼았다.

 

1084에는 당시 소아시아를 휩쓴 셀주크 투르크에 점령되었다가 

1098 제1 십자군 원정 당시 십자군이 이 도시를 점령하여 안티오키아 공국을 세웠다. 

안티오키아 공국은 두 세기에 걸쳐 라틴계 로마 가톨릭 독립국가로 존재했으나 

1268 시리아  이집트를 손에 넣은 맘루크 왕조의 침입으로 무너졌고

안티오크는 다시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1517 오스만 제국이 안티오키아를 차지한 후

 제1 세계대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현재 터키의 도시가 되었다.

 

바오로 기념성당 유적









                                  <네개의 돌기둥 문의 초석만 남아 있는 입구.>

 

 

<폐허가 된 원형 극장>

                                   <정교하게 조각된 대리석 파편들이 옛 영화만을 전한다.>

 유대교 회당 자리었던 곳에 성당을 세운 특별한 사례인 비잔틴 시대에 지은

바오로 대성당의 초석이 남아 있는데, 대성당을 건축하기 전에 작은 성당이 있었음을

이곳 주교 옵티모스(357 - 381)의 명패 모자이크 두개가 발견으로 ​입증되었다.



 

 

                                                               <세례터>

                                                  <대성당의 대리석 초석>

 

                                                            <대성당의 강단 유적>

 

 

 

콘야 에블라나박물관

콘야는 터키 중부 내륙 지역의 도시로써 옛날 셀축트루크의 수도였던 터키 주요 도시이다.

그 옛날 비단길, 도자기의 길, 면화의 길, 향료의 길이라는 다양한 이름의 길이

대부분 콘야를 거쳤을 만큼 교통의 요지이다.

 

콘야는 메소포타미아문명의 발상지인 유프라테스강이 근처에 흘러 형성된

인류 최초의 주거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콘야는 메블라나 루우미가 12세기에 창시한 이슬람 소수파인 수피 교단 중 하나인

터키 이슬람 메블라나 교단의 본산지이다.

메블라나는 유일신 알라와 만나기 위해서는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하며,

금욕과 고행을 통한 끊임없는 기도생활을 해야 한다고 본

다소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는 터키 특유의 이슬람이라 할 수 있다.

이 교단의 수피들은 매블래비(Mevlevi), 또는 소용돌이치는

수도승(The Whirling Dervish)이라고 불리었는데,

교단의 수피들이 격렬한 행위를 하도록 하여 그 절정을 이루게 함으로서

예배를 수행하는데서 Whirling Dervishes 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고,

이 신비를 체험하는 방법으로 나온 것이 Whirling Dance 이다.

 

 남성 무용수, 원통형 모자, 하얀 윗도리, 둥근 치마, 침묵 속의 댄스로 요약되는

The Whirling Dervish는 춤추는 자를 황홀의 경지로 이끌기에 충분해 보였다.

이러한 특수한 수련 방식은 신비주의적 색채가 농후하다는 이유로

정통 이슬람에서는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이슬람은 알라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도록 할 뿐

개인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 

                                                        카파도키아 부근의 터키석 판매점





 

 

 

                                                        슐탄이 지어준 대상들의 숙소









 



                                             <끝없는 고속도로를 달리다 혹간에 만나는 휴게소>

 

 

에블라나 박물관

메블라나 박물관은 콘야인들의 자랑이다.

박물관에는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를 창시한 메블라나의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원래 궁전의 장미 정원이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왕이

메블라나의 아버지 바하틴 벨레디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입구에서부터 가장 이색적으로 인상을 주는 푸른색 타일로 장식된 탑은 1396년에 세워진 것이다.

 터키 정부가 이곳을 박물관으로 개장한 것은 관은 1927년이다.

The Whirling Dervish의 창시자인 메블라나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던 이 박물관은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The Whirling Dervish의 명성 때문에

1년에 백만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온다고 한다.

내부 촬영이 엄격히 규제되어 아쉽다.

























 

                                 Whirling Dance 를 추는 수피들의 사진

 

                                                         박물관의 아름다운 정원





 터키의 현대적인 전통가옥

                                   <사도 바오로가 돌을 맞고 쫓겨난 산간벽지인 리스트라

                                                --높은 바위가 성벽처럼 둘러싸인 지형이 이채롭다.>



                                     

                                    지중해 에게해에  위치한 안탈랴 크라운 플라자 호텔















 

 

 

 







 


 

 




 


 

 

 

 

                 사도바오로의 출생지인 타르소스(다르소)에 있는 바오로 기념성당

 













 

​             순례자들을 끌어들이려고 신빙성 없이 어느 부잣집 우물에 '바오로 생가 우물터' 라 이름 붙였다 







                      로마로 통하는 곧은 길 - 돌로 잘 포장한 길 옆에 상가가 있던 터와 흔적이 있다

 

버스에서 본 터키의 풍광들

 



 

데린구유(깊은 우물이라는 뜻)

최대 3만명이 살았던 대규모 지하도시로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지하로 들어와

교육기관과 십자가형 교회,와인저장고,마굿간과 거주지, 병기고 등이 지하 8층까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환기가 잘되며​ 지하에서 일기도 관측할 수 있다.

규모는 다르나 40여개의 지하 거주지가 발굴​되어 1965년 처음 일반에 공개되었으나

관람구역은 전체의 10%에 불과하다.​



 

 

14박 15일('14/06/02 - 06/16)간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수도회)

김성태 (토마) 신부님이 인솔하는

성지대표부 28차 성지순례단 32명이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여행길에 오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지상 모습이 신기할 때가 많다.







 

 

이스탄불 상공





성지순례 관광버스와 이스탄불에서 묵은 호텔

 

 

<호텔 바로 앞에 있는 이슬람 사원 

-- 국민 98%가 이슬람교인인 터키에는  사원이 공동체의 중심이다.>

바오로의 탄생지 타르소스를 가기 위해 국내선 항공기를 타다.



해발 3000m를 넘는 타우루스(황소) 산맥의 만년설



비행기에서 본 터키의 어느 도시와 산지와 평야



 

 

                                                    가로가 잘 정비된 어느 도시의 도로

                        <우리나라 포항처럼 철강도시인 이스켄데른시가 해안선을 따라 길게 뻗어있다.>



                                           이슬람국가는  이슬람 사원이 마을의 중심이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이스탄불 ->인천공항(여행 마무리) 

터키 이스탄불에서 보거나 경험한

잡다한 사진들......


그랜드 바자르


비잔틴 시대부터 현재 그랜드 바자르가 있는 장소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후 터키가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서 1455-1461에 걸쳐 이곳에

 도시의 경제생활을 부강하게 만들 목적으로 두 개의 주 아케이드가 만들어진 이후

 사람들은 활발한 상업활동을 위한 더 많은 장소를 필요로 하였고 

그 결과 주 아케이드의 바깥부분까지 그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오토만 시대를 거치면서 지진,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던

 이 곳은 몇 번에 걸친 복구 끝에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18개의 출입구와 4천개 이상의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는

 세계의 가장 큰 바자르 중의 하나로 터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은 관광명소로 손 꼽히고 있다.





<그랜드 바자르의 액세사리 가게>


트램바이


트램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선 교통수단으로 
지상전철, 노면전차라고도 불리는 트램 Tramvay은 
말그대로 승용차와 같이 지상을 다니는 전차다.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되며 접근도 쉽고 이동이 가능한 

두 량씩 짝지어진 네 량의 차량이 편리하게 궤도를 운행하며 

교통신호도 똑 같이 따른다. 

 

이스탄불에서는 1872년부터 이용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아주 중요한 교통수단 중 하나로  이스탄불 시민들과 여행자들의 발이 되어주고 있다. 

 

 

수도교

로마시대부터 물을 끌어오기 위해 높은 성곽을 쌓고 수로를 만들었다






갈라타 타워 - GALATA KULESI


 이 타워는 6세기경 '그리스도의 탑'이라는 이름으로 비잔틴 제국에 의해 

건축되었던 것이나 14세기 제노아에서 이주해온 민족들이 자신의 자치령에 따라 

재건한 것으로 지역의 이름을 따라 갈라타 타워로 개명되었다.

오스만 제국시대이던 1446년에 타워의 상층부가 추가되면서 

그 모습은 급격히 변화하게 되었으며 시대가 흐르면서 

이 곳은 감옥, 화재감시탑, 해상감시탑 등 그 용도면에서도 다양하게 이용되어졌다. 

현재 갈라타 타워의 높이는 63미터로, 

가장 높은 곳의 두 층은 전통쇼를 가미한 레스토랑으로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지하저수조(예레바탄 지하 궁전) 


건설에만 무려 7,000여 명의 노예가 동원되었던 지하 저수지인 

예레바탄 지하 궁전은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건설되었다. 

지하 궁전은 길이 143m, 폭 65m, 높이 9m에 달할 정도로 웅장한 크기를 자랑한다. 

항상 전장(戰場)이었던 이스탄불은 안정적인 물 공급이 필요하여 

저수지를 많이 만들었는데 그 당시 저수지 중 

규모가 가장 컸을 뿐만 아니라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저수지로 사용된 이곳이 지하 궁전이라 불리게 된 것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돌기둥 때문인데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총 336개의 아름다운 대리석 기둥은 각지의 신전에서 운반해 온 것들이다.

 1885년 이곳은 복원 공사를 거쳐 조명, 음향 시설 등을 설치하고

 여행객들을 위한 보도를 만들었다. 

이 시기 저수지에서는 거꾸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가 발견되었다. 

메두사가 거꾸로 놓인 이유는 메두사의 눈과 마주치면 돌이 되어 버린다는

 전설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지하 저수지들는 레스토랑, 콘서트 무대 등으로 사용되면서 

시내의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지하저수지 출입인 지상 건물



지하저수지의 돌기둥들



거꾸로 놓인 목 잘린 메두사의 머리 조각품




 

이스탄불 오벨리스크


술탄아흐메트모스크 맞은편에는 비잔틴 시대에

 전차경주를 하던 원형경기장인 히포드럼 광장이 있다. 

이곳은 "U"자 형태의 큰 경기장이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고 이집트 오벨리스크와 뱀기둥, 콘스탄틴기둥 분수대 등의

 유적들만 남아있는데 고대 도시의 심장부였던 굉장히 의미있는 곳이다.

10만명 관중을 수용할 수 있던 경기장이니 규모가 감히 짐작되지 않는다. 

검투경기장이었다가 검투가 금지되고 대전차경기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거대한 오벨리스크와 뱀기둥이 있는 히포드럼(경기장)은 블루모스크 앞에 위치해 있다.

양갈비로 마지막 점심을 먹은 터키음식점




보스포러스 제1대교 야경 

보스포러스 제1대교는 아시아와 유럽  대룩을 잇는 다리로 

사람이 통행할 수 없도록 제한이 되어있으며  

1970년 착공해서 1973년 10월 23일  

터키공화국 수립 50주년에 맞춰 개통한 다리로 길이는 1560m이다.


 사람들의 통행을 제한 이유는 다리위에서 자살자들이 많은 이유로 금지시켰으며 

 인천대교와 마찬가지로 운행 중 차에서 내랄 수 없도록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자살기록 4위를 기록한 이 다리에서는 2001년에 146명이 뛰어내려 24명이 사망했고, 

듬해에는 190명이 뛰어내려 이 가운데 38명이 목숨을 잃었다.  



갈라타다리 아래 즐비한 레스토랑에서 바라본 제1교의 야경




갈라타다리 아래 레스토랑에서 시원한 맥주 파티



에니 모스크의 야경

갈라타 다리 위 레스토랑에서 본 애니모스크의 야경





휘엉청 밝은 달이 하늘 구름에 걸리고

 

이스탄불 옛 성곽과 망루들의 모습








가죽 옷 공장 패션 쑈








가죽옷 전시 판매장

 




<성지순례 여행 마지막 저녁식사를 한 한식당>


한식당에서 관리하는 길고양이들





탑승하기 전의 이스탄불 국제공항에서




10여시간의 비행 끝에 인천공항에 안착하다.


우리나라 인천공항 상공에 도착하다.


<15일간의 성지순례여행의 추억을 간직하고 아쉬운 작별의 시간....>





<15일간의 성지순례여행의 추억을 간직하고 아쉬운 작별의 시간....>







 

이번 터키,그리스 성지순례 여행

사진정리 및 블로그 등재를 마무리 했다.

긴 일정에 순례한 곳이 많아 기억이 잘 나지 않고

내용도 정확하지 못한 것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이번 여행에서는 정감 넘치는 현지인들의 친절함과

양식이지만 대체로 입맛에 맞는 음식,

폐허가 됐지만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유적들과 문화재들,

 

유식하고 친절한 터키 가이드 이은경 아가다 씨와

그리스 가이드 조동규 목사님의 친절한 안내가

오랫까지 기억돨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부님이 집전하는 매일미사에 참례는 

성지순례 여행 원천의 힘을 부여해 줬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이스탄불 코라 구세주 성당 (The Chora Church) 

 

코라 구세주 성당 (The Chora Church) 


코라 구세주 성당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성밖에 세워졌다. 

'교외, 도시 근교의 시골' 을 뜻하는 그리스어 Chora의 발음이 변하여 

카리예(Kariye)가 되었고, 현재는 카리예 박물관(Kariye Museum)으로 이용되고 있다. 



프레스코 (Fresco)화

프레스코 (Fresco)는 a fresco (방금 회를 칠한 위에) 라는 

이탈리아어에서 나온 낱말로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많이 

그려진 벽화를 일컫는 단어로 프레스코는 인류 회화사에서 

아마 가장 오래된 그림의 기술 혹은 형태로 여겨진다.

 

기원전 약 3000년에 미노스문명의 중심지인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의 벽화는 

프레스코의 기술로 그려졌으며, 기원전 5세기 이래 중국, 한국, 일본에서도 

그려진 불교의 대부분의 벽화는 프레스코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삼한시대의 고분벽화 역시 프레스코의 기술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도 베드로


메인 돔 천정 한가운데 아기예수님을 안은 성모화와 주위를 둘러 싼 사도들

 





이집트로 피신하는 성가정



























아시아 대륙 끝 위스크 다르에 위치한 코라 성당은

 558년의 대지진때 완전히 파괴되어 유스티아누스 황제( 527-565년)가 개축하였다.

현재 성당의 원형은 비잔틴 왕조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소스(1081-1118)의 

장모 마리아 듀카스(Maria Dukas)에 의해 1077-1081년에 세워졌다. 

그 후 안드로니코스 2세의 총리 테오도레 메토키데스가 

1315-1321년 현관과 부속경당을 증축하고

 내부의 천정과 벽에 성경의 내용을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로 장식했다. 

특히 테오도레 메토키데스가 예수님께 성당을 바치는 모자이크도 남아 있어

 당시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으나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된 이후 

탄압으로 파괴되고 개축되어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다. 

오스만 제국의 건축가 시난이 성당의 중력을 지지할 목적으로 

16세기에 4개의 미나레(Minaret, 이슬람 사원 첨탑)를 외부에 세운 후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성당에는 중앙(Naos)의 메인 돔을 포함해 5개의 돔이 있다. 

성당 중앙(Naos)은 내부 나르텍스(Narthex, 출입문에서 성당 중앙을 연결하는 현관 홀)

와 연결되고 중앙 문을 통과하면 내부 나르텍스(성전 중앙으로 들어가는 내부 입구, 폭4m, 길이18m)가 있는데 구조적으로 내부 나르텍스는 창을 만들 수 없어 볼트(Volt, 비닐하우스 형태)형 천장에 두개의 돔을 만들어 돔과 볼트 사이에 채광창을 만들었다. 

이 채광창을 통해 돔 천장의 황금빛 모자이크에 반사되는 빛은

 경외감과 신비감을 자아낸다. 

외부 나르텍스 (전체 건물 외부 입구, 폭4m, 길이23m)

천장에는 모자이크로 된 성화가 그려져 있다.

이슬람 정복 이후 성당 내부에 있던 성경의 중요 내용을 그린 

아름다운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들은 회반죽을 덮여 

이슬람 사원으로 오랫동안 이용되었으나 

1948년 이후 복원되어 건립 당시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고 있다. 

그 가운데 부속경당의 <최후의 심판>, <부활> 등 모자이크와 벽화는 

비잔틴 후기의 명작으로 순례자들의 경외감을 자아낸다. 



건축 당시의 조감도 --이슬람 사원의 첨탑 마나레가 없다.





 

<16세기에 세워진 네 개의 미나레(Minaret, 이슬람 사원 첨탑)​중 하나>

<성당 입구에서 본 내부의 모습>

<메인 돔의 아기 예수님을 안은 성모님 주변을 사도들과 성인들이 둘러 싼 성화>





 성경의 중요 내용을 그린 아름다운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









 


 

가득 채워져 있어 화려하기 그지 없다.


중세인들의 신앙심과 열정과 노력에 경외심이 엄습한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이스탄불 주교좌성당과 마리아성당 

이스탄불 주교좌 성당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주교좌 성당에서 10년간 사목하셨다고 함>


주교자 성당에서 순례자 미사봉헌









이스탄불 성 마리아성당에서 교민들과 합동미사​















순례단 지도 김성태 신부의 미사집전에 교민들이 감동한 것 같다.

















교민 꼬마 교우들의 순레단 환영 노래와 율동공연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이스탄불 보스포러스해협

보스포러스 해협 (Bosphorus Straits)


  보스포러스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해협으로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는 

            길이 약 30km, 넓은 곳 폭 3500m, 좁은 곳이 700m로, 

          물 흐름이 세차서 해협 안 여기저기에서 물소용돌이가 치고 있다.

 양측 해안에는 고대 유적지, 그림같이 아름다운 전통적인 터키 마을, 

울창한 숲 등이 곳곳에 있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으며 

음식점, 찻집, 별장 등이 있는 매우 조용한 곳이다. 


고대와 중세까지만 해도 지중해와 흑해간의 거의 모든 상거래는 

이 해협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무역에 있어 보스포러스 해협의 중요성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져 

매년 38,000여척의 배들이 이 곳을 통과하고 있다.
이 해협 대교는  인근 지역과 이스탄불의 야경 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힌다.  


보스포러스해협 관광유람선 선착장이 있는 갈라타 브릿지 부근​

<갈라타 다리와 유람선>


왼쪽 언덕 위에 갈라타타워,오른쪽에 에니모스크가 보인다



보스포러스 제1대교


<보스포러스 제1대교와 대교 아래 이슬람 사원은 관광명소라고 함> 




<제1대교 유럽쪽 언덕 위의 고급 주택들과 호화요트>


터키의 잘 보이는 곳에는 대형국기 게양대에서 터키기가 펄럭인다. 


 

보스포러스해협 제2대교



유람선에서 본 갈라타 다리 부근의 선착장과 애니모스크




<유람선에 본 성 소피아성당>


<유람선에서  돌마바체  궁전> 




전에 해군사관학교로 쓰다가 현재는 수산고등학교로 사용하는 건물



제1대교 아래를 통과하면서...





왕실의 여름별장


보스포로스 해협 관광 유람선과 제1대교

.



왼쪽의 높은 탑이 갈라타 타워


돌마바체 궁전앞 동마바체 모스크와 대형시계탑


<아시아 쪽 해변에 위치한 이슬람 사원>


돌마바체 모스크 뒷편의 대형 쇼핑몰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톱카피 궁전

돌마바흐체 궁전 (DOLMABAHCE PALACE) 

가득찬 정원이란 뜻의 돌마바흐체 궁전은 해변을 흙으로 메꾸고 세운 곳이다. 

50만 금화, 즉 현재 돈 5억불에 맞먹는 기금으로 건립된 이 궁은 1856년 완공되었는데, 궁의 내부 장식과 방들을 꾸미기 위해 총 14톤의 금, 40톤의 은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3층의 대칭구조로 지어진 궁의 내부에는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 280개의 화병, 

156개의 다양한 시계, 4톤과 2톤 중량의 샹들리에를 포함한 36개의 샹들리에, 

58개의 크리스탈 촛대, 560점 이상의 그림과 

손으로 직접 짠 대형 카페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급격히 악화되어가는 시점에서 이를 만회하고자 

서구화를 추진하고 국력 쇄신을 도모하던 압두메짓 1세가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해 초호화판으로 이 왕궁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결국 막대한 건축비 지출은 어려웠던 왕실 재정을 더욱 악화시켜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호화로운 궁전의 정문>




잘 꾸며진 정원




<궁전의 부속건물로 들어가는 문>


돌마바흐체 궁전 중앙 출입구

 

<돌마바흐체 궁전은 보스포러스 해안의 연약지반에 건설했기 때문에 

 속은 가벼운 나무 위에 석재를 덧씌워 건축자재로 썼다고 함>


<궁전 울타리 밖이 바로 보스포러스 해협이다.>



<멀리 언덕위의 사원이 블루 모스크(?)다>


<궁전 앞의 거대한 시계탑과 뒤편의 돌마바흐체 모스크>



갈라타 다리


갈라타 다리 아래 관광선 접안 부두


갈라타 탑


<보스포러스해협 제1교 >

갈라타 다리 옆에 위치한 애니 모스크



톱카프 궁전 

오스만 제국의 술탄(황제) 메메트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처음 건설한 톱카프 궁전은 15세기경부터 400여 년 동안 오스만 터키 제국의 

최고 권력자였던 24명의 술탄들이 거주하던 왕궁으로, 

성 소피아 성당 바로 뒤편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고전적인 오스만 풍의 건축양식으로 건설한 이 궁전은

 1856년 돌마바흐체 궁전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이스탄불 최대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터키어로 톱(Top)은 대포를, 카프(Kapi)는 문을 의미하는데 

옛날 이 궁전의 문앞에 커다란 대포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전체 면적이 21만평이나 되는 톱카프 궁전은 5k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28개의 탑에 입구는 바다 쪽에 3개 내륙에 4개이다.

당시 이 궁전 안에는 왕족과 귀족들, 

그리고 하인과 병사 등 약 5,000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관람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궁전은 4개의 문에 의해서 4개의 정원으로 나누어 진다.



<제1문인 경건의 문- 무료입장>

​<톱카프 궁전의 배치도 모형> 



<6세기 경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건립한 궁내 유일한 이레네성당>



<제2문인 황제의문 - 유료 입장>
 


튼튼한 성벽과 초소




<술탄의 여인들의 통태를 감시하던 궁정에서 제일 높은 감시탑>
 


<술탄과의 대화를 엿듣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물꼭지>


<대신들과 국사를 의논하던 다완(내각)건물>



<제 4정원에서 바라본 보스포러스 해협과 제1교>


<궁전의 이슬람 사원>



왈실의 다양한 보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변한 왕궁 건물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이스탄불 성 소피아성당, 블루 모스크 


성 소피아 성당(아야 소피아 박물관)

 

성 소피아 성당은  이스탄불에 산재해 있는 여느 모스크와 비슷해 보인다. 

간혹 사람들은 마주 보고 있는 블루모스크와 아주 흡사하다고 느낄 것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현재 성 소피아 박물관이라는 정식 명칭을 가지고 있지만, 

이곳은 최초에는 성당이었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규모 면에서도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성 소피아 성당은 오늘날까지도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공인하고 이곳에 머물기로 정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새로운 도시의 큰 사원'으로 325년 창건했던 성 소피아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에 따라 532년-537년에 다시 크게 개축되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성 소피아 사원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이후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이곳은 회교사원, 

즉 모스크로 그 용도가 바뀌면서 성당을 둘러싸는 미나레트가 세워지고, 

성당 안벽은 회칠로 덮이고 그 위에 이슬람교 코란의 금문자와 문양들로 채워졌다. 

회칠 속으로 성모마리아의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들은 모두 사라졌다.

1934년 성 소피아 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정식 명칭을 바꾸면서 복원작업이 진행되어 

두꺼운 회칠을 벗기자 성모마리아를 비롯한 비잔틴 시대의 화려한 흔적들이 드러났다.

성 소피아 성당의 중앙에 서면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공존하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는 역사적인 장소임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본당의 넓이는 75m X 70m로 7,570평방미터에 달하고 천장높이는 55.6m, 

돔의 지름은 33m에 달하여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높이이며 

40개의 대형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자연채광구조이다. 

또한, 영국 텔레그래프 선정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10선에 선정된 곳이다.

여러 각도에서 본 성 소피아대성당의 외관​










성당 서쪽의 입구 -- 이슬람의 파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중앙의 큰 출입문은 왕이나 황제의 전용문​ 


기계로 자르지 않았는데도 대리석 문양이 완전 대칭을 이루고 있는

 벽의 대리석  대형타일


아직도 복원 작업이 진행중인 철 구조물과 그물 때문에 경관이 어수선하다.









중앙 돔의 가장 높은 천정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님의 천정화


천정 돔을 떠바치는 기둥상단에 대형 회교문자가 분위기를 어지럽힌다.


기둥 위 아름다운 문양의 조각

내부의 천정 모습들 

 

 

중앙 돔의 이슬람 문양 - 회칠 안에 어떤 성화들이 숨어 있을까??


성서 문구를 모자이크화로 표현한 작품들




빛에 반응하는 특수한 타일로 제작된 예수님과 성모님 성화





베드로 사도(?)의 모습







경사로를 걸어 2층으로 올라가 1층 사원 출입구를 내려다 본 모습


소피아사원 관람 후 나오는 남쪽 출구


 

블루 모스크 - Blue MOSQUE

 

오스만 시대에 지어진 직경이 27.5m, 높이가 43m에 다다르는 

술탄아흐멧 모스크는 규모면에서 터키 최대의 것으로,

 맞은편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우위를 상징하기 위해 

그 양식을 모방, 발전시켜 건축한 독특한 형상의 회교사원이다. 

 내부 벽과 기둥이 푸른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블루 모스크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다. 

돔의 200개가 넘는 조그만 창은 스태인드 글래스로 장식되어 있어 

이를 통해 들어오는 아름다운 햇살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내부 천정과 벽면에 섬세한 이슬람 문양이 화려하다.


참배할 때 여성들은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야 한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그리스 출국, 터키 재입국

 

그리스 성지순례 마지막날 아침,

카발라 루시호텔에서 아침 6시에 미사를 봉헌하고

식사 후 8시에 출발하였다.

그리스와 터키 국경도시 압살라에서 간단한 출입국 수속 후  터키 땅을 다시 밟다.


<그리스 출입국 사무소>


<터키 입국 통과대>







<터키에 재입국하여 한적한 고속도로를 달리다>




터키의 어느 항구도시 식당에서의 늦은 점심식사




<사진 찍히기를 좋아하는 터키인들과 공연비를 받는 즉흥연주>




<지붕 위에 집열판과 온수 탱크가 설치된 전형적인 터키의 주택>



회교 국가답게 어디에나 이슬람 사원을 볼수 있다.

...사원의 첨탑이 1이면 주민들의 공동설립 사원

                                            2이면 부자가 지역민에게 기증한 사원

                                            4이면 국가(슐탄)가 ​건설한 사원으로 구분되며,

                                성직자는 국가에서 임명하고 관리한다고 한다.








<흰색의 벽에 붉은 기와의 주택들이 주변과 잘 어울린다.>




<다시 이스탄불에 들어오자 신시가지가 눈에 띈다.>




<터키에도 아파트 건설 붐이 한창이란다>




넓은 국토를 가진 날인진 몰라도 초고층 아파트는 눝에 띄지 않는다





<복잡한 고속버스 터미널-국토가 넓어 며칠이나 걸리는 노선이 있어 기사가 2명이란다>

이스탄불 시내 곳곳에 옛 성곽 잔재를 쉽게 볼 수 있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리디아기념성당,카발라 

 


테살로니카에서 카발라로 이동하는 중간 암피폴리스 부근의 시골식당에서 중식


 

암피폴리스 사자상: 

알렉산더(헬레니즘시대)시대에만들어진 사자상으로  2300년이 넘어

사도 바오로 시대에도 존재했었던 사자상이며 

지금도 국도변에 이렇게 자리하고 있다.



필리피 리디아 입교 기념성당

바오로 사도가 유럽땅에서 입교시킨 첫 번째 교우가 

바로 티아티라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였던 리디아라는 여인이다.

바오로 사도는 원천적으로 교우들의 물질적 도움은 사양했지만 

리디아의 간곡한 요청에 의해 리디아집에 머물며 전교활동을 했다. 

리디아 입교성당은 아담하면서도 외관이 매우 아름답고 

내부는 천정과 벽은 수많은 성화들로, 

그리고 바닦은 회색계통의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성당 앞은 너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유적의 파편들이 나뒹굴고 

그 앞에는 계곡물이  흐르는 리디아 세례터가 있다

 

그곳에서 야외미사를 봉헌하며 유럽 최초의 그리스도교인이었던 

리디아의 신앙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리디아 기념성당 앞의 풍경 -- 유적의 잔재가 너부러져 있다.

아담하면서 톡특한 외양의 리디아 기념성당


리디아 세례터에서 야외미사를 봉헌하다.


그리스 정교회 성당답게 내부는 온통 성화들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카발라 (그리스)

카발라(그리스어: Καβάλα)는 그리스 북부 에게 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동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 주에 속하는 현인 카발라 현의 현청이 있는 항구도시다.

  바오로가 제 2차 선교여행때 토로아스를 출항하여 이 항구에 상륙한 후

약 20km 떨어진 필리페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바닷가에 위치한 투숙한 백색의 루시호텔>




<호텔 앞 작은 해수욕장에서 해수욕을 즐기고.........>



이곳도 길냥이들의 천국 같다.


휘영청 보름달이 예쁘고 야경도 아름답다.


<이번 여행에서 제대로된 일출과 일몰을 감상할 수 없는 아쉬움이 크다.>

이튿날 아침 일출시간대의 카발라


 호텔에서 새벽미사 봉헌

출발직전 호텔 앞의 풍경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테살로니카 성디미트리성당

성화 제작소 방문

수사님들과 여성분들이 순전히 손으로 그리는 성화는 정교하고 값이 꽤 비싸다.





이 분이 제작한 성화를 구매하면  직접 사인해 준다.





제작 전시된 성화와 이콘들
 

 

구름 덮힌 그리스 최고봉인 올림푸스 산(해발 2717m)











 

성 디미트리오스 성당(그리스 정교회) 

 

성 디미트리오스는 A.D.303년 디오클레시아누스 치세때 혹은 A.D.306년 막시미아누스

 치세때 헝가리 시르미움에서 순교한 분으로 테살로니카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당시 23세로서 군인인 디미트리오스는 그리스도교인 박해때 

그리스도인들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막아 나섰다가 잡혀 순교한 분이다.

그가 죽자 유골함에서 기름이 흘러 내려 그 기름을 발랐던 

많은 사람들이 치유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리스도교 박해때 여러 신자들과 병사들의 꿈에 나타나 

 테살로니카 도시를 파괴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5세기에 지은 성당은 7세기에 재건되었으나 

 1917년 도시의 화재로 거의 소실되고 후 지금의 성당이 재건되었다. 

그리스에서 가장 큰 정교회 대성당이다. 







<성당 앞 왼쪽 뜰에 마련된 수사님의 무덤>

성 디미트리오스 성당의 화려한 내부





























<치유 기적이 일어난 성 디미트리오스의 유골함>

성당의 지하 유적들​








 

 



<테살로니카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과 성곽의 문 유적>
 

 

 White Tower(Lefkos Pyrgos)

  


데살로니키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 중 하나로 15세기 베네치아 사람들이 세운 

성의 일부로 망루(?)로 사용했으나,

 18~19세기 터키의 오트만제국 시대에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이곳에서 대량 학살이 벌어져 "피로 물든 탑"이라 레드 타워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 후 탑의 표면을 하얗게 칠해 화이트타워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현재는 비잔틴 시대의 유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테살로니카의 현대적인 조망탑>



그리스 인구의 98%가 국교인 그리스 정교도라 동네마다 정교회 건물들이 중심이다.

마치 이슬람사원이 터키 마을의 중심이듯이.........

암피폴리스 사자상 (Lion of Amphipolis)

도로 가에 외롭게 서 있는 사자 조형물은 기원전 2세기 경에 

블록으로 만들어진 좌대위에 앉아있는데, 

이 사자상은  미들리니(Mytilene)섬의 선원이었다가 후에 

시리아의 총독이 된 라오메돈(Laomedon)을 기념하기 위해 것이라 추정된다. 

이 블록은 1936-37년 조각나 있던 것을  다시 조립한 것으로 

스트리몬 강에서 건져낸 것인데 아마도 중세때 

스트리몬 강의 댐을 만드는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그리스 메테오라 수도원

세계 복합문화유산  메테오


 

세계 복합유산으로 지정된 메테오라는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는 수도원'이라는 뜻이며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 위에 세워져 있어 '하늘의 기둥'으로도 불렸다.

한때 스물세 개의 수도원이 세워졌으나 불안정한 지반 때문에

 18세기 말에 대부분 무너졌고  

현재는 수도원과 수녀원을 합해 여섯 곳 만이 남아 있다. 


 바위들의 평균 높이는 300m, 가장 높은 것은 550m나 되니 

수도원들은 정말로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이다. 

메테오라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 중부 테살리아 지방 

북서부 트리칼라 주의 바위 기둥들과 

그 위에 세워진 수도원을 통칭하는 말이다.


<메테오라에 진입하면서 차에서 촬영한 웅장한 바위산>

양갈비 점심식사를 한 식당에서 촬영한 사진들.......








메테오라 수도원 올라가는 험로에서 촬영한 차창사진들.........









           바를라함 수도원(The Holy Monastery of Varlaam)    


바를라암 수도원은 메테오라에서 대 메테오른 수도원에 이어 

두번쩨로 큰 수도원으로 1541년에서 1542년에 세워졌다. 

은둔한 수도자 바를라암에 의해 세워졌으며, 

후에 그의 이름을 따서 바를라암 수도원이라 불리웠다.

예수, 마리아, 베드로, 바오로, 싯소이스 벽화가 유명하다.

















 

성 스테파노 수녀원 

 

성 스테파노 수녀원은 다른 수도원들과 비교해 작은 편이지만 

메테오라의 수도원들 중 가장 잘 보존되어 현재 수녀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는 16세기 중반에 세워진 1개의 작은 본당이 있는 

성 스테파노스 교회가 있으며 사마리아 여자(요한4 ), 

물고기 잡이 기적(요한 21 )벽화들과 감탄이 절로 나는 황금 잎새 조각상과 

성 카랄람보스의 성스러운 두상이 은그릇에 보관되어 있다.

 

 

<수녀원에서 내려다 본 메테오라 시가지>

성 트리니티 수도원(The Monastery of Holy Trinity)  


 

가장 관람하기 어려운 수도원으로 입구에 도착하기 전에 

방문자들은 계곡을 건너서 바위를 지나 위로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1476년 수도사 도메티우스에 의해 세워졌으며, 

이곳 교회에는 서투르게 그려진 벽화(200년후에 추가됨)가 보존되어 있다. 

두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돔으로 된 이 교회는 

1475년에서 1476년에 세워졌으며, 십자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트리니티 수도원은 정원과 구조물이 서로 분리되어 

그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으며, 

멀리 눈으로 덮힌 핀도스 산맥이 바라다 보인다.
 속세와의 차단을 위해 물자 보급과 사람들의 출입은 

도르래를 이용해 광주리에 담아 끌어올리거나 

밧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거나 하였으나 

1925년에 돌을 쪼아 140계단을 만들었으므로 지금은 걸어서 올라간다.

사진 우상 귀에 도르래 장치가 보인다.




 

 

 

 


 

 

 



<수도원 창립자가 최초로 수도했던 곳>
 



수도원 내부-공구실,와인통,수도사 유골실,




 

수도원 내부의 성화
 

 

 

 

 

 

<수도원 주방의 기구들>

<메테오라 호텔 디바니>

호텔 뒷편에서 촬영한 메테오라 암벽산
 

 





메테오라에서는 냥이들도 수도를 하나??

 







메테오라 시내의 모습들





 

 

 


<아테네에서 메테오라 가는 고속도로의 요금소와 주변 풍경>
 

 

페르시아 전쟁 때 그가 그리스 중부 테르모필라이의 협로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군을 맞아 용감히 싸운 이야기는 그리스 사람의 용기를 나타내는

 전설이 되었으며 서유럽 역사를 통틀어 영웅적 용감성의 전형으로서 칭송되었다. 

네오니다스는 아기스 왕가 출신으로 BC 490년경 

이복형제인 클레오메네스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클레오메네스의 딸 고르고와 결혼했으며 클레오메네스가 

다른 그리스 도시들을 공격하는 것을 도왔던 것으로 보인다. 

BC 480년 소규모 그리스 군대를 거느린 그는 테르모필라이를 지나 전진하려는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의 대군과 맞섰다. 

2일 동안 페르시아의 공격을 견뎌낸 다음 대부분의 군사를 철수시키고 

친위병 300명과 함께 남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다 죽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에 큰 감명을 받았고 

스파르타인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는 전설이 여기서 생겨났다.(영화 300의 원전) 

,그리스 중부 테르모필라이에 있는  레오니다스장군(스파르타왕) 동상>



<유구한 역사를 가졌으며 히포크라테스가 사망한 그리스의 중부도시 라미아>


<메테오라에서 유명한 양갈비식당인 테아 - 한글이 반갑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그리스 아테네 


아테네 [Athens]그리스의 고도(古都)이자 수도.

서구 문명의 발생지이며, 고전 문명의 많은 지적·예술적 사상이 비롯된 곳이다. 

외항 피라이우스가 있는 에게 해의 팔레론 만 연안으로부터 8㎞ 떨어져 있으며, 

동쪽의 페탈리온 만과의 사이에는 히메토스(이미토스) 산맥이 가로지르고 있다. 

 대(大)아테네는 지금의 그리스에서 하나의 디아메리스마(행정지역)를 이룬다. 

기후는 온대성으로 겨울은 온화하고 여름은 덥고 건조하다. 


아테네는 무엇보다도 고대의 신전과 공공건물들로 유명하다. 

그중 이 도시의 수호 여신인 아테나를 위해 세운 직사각형의 원주식 신전인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그리스의 도리아 양식 건축물 가운데 백미로 꼽힌다. 

파르테논이 있는 아크로폴리스에는 원래 아테나와 포세이돈의 신전이었던 

에렉테움과, 아크로폴리스의 벽을 통해 입구가 이어지는 프로필라이아신전도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기슭 남쪽에는 헤로데스 극장과 디오니소스 극장이 있고 

북서쪽에는 고대 장터였던 아고라가 있다. 

아고라 부근에서 발굴된 거리들과 아크로폴리스 북쪽 사면의 화려한 플라카 지구에 

고대 아테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국회의사당 건물 부근에는 국립공원과 신타그마(헌법) 광장이 있다. 

특히 광장에는 고급 호텔과 카페들이 많아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중요 박물관으로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국립고고학 박물관, 비잔틴 박물관이 있고, 

학술기관으로는 아테네대학교(1837 재설립), 그리스 아카데미, 국립도서관이 있다.


 


하드리아누스 문 - Hadrian's Gate, Athens  




신타그마 광장에서 도보 7분 거리에 옛 그리스 마을과 새 로마인 마을을 구분지었던 

히드라이누스의 문이 있다. 

131년 히드리아누스 2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문으로 높이는 18m, 

너비 약 13m의 건물이다.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

그리스 아테네 모나스트라키 광장 주변에 있는 아크로폴리스는 
높은(akros) 도시(polis)라는 의미로 폴리스의 수호신을 모시는 
여러 신전들이 세워져 있는데, 
현재는 한장의 티켓으로 아크로폴리스 고고학 박물관, 아고라, 디오니소스극장, 
로만 아고라, 제우스신전을 입장할수 있다. 

아크로폴리스 입구의 오른쪽에 위치한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은
 6,0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현재도 매년여름철 아테네 페스티벌을 비롯해서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 등이 열린다.

 
 


                                    <아크로폴리스 출입문> 
 

파르테논 신전 [Parthenon  神殿]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있는 아테나 여신의 주(主) 신전으로 

BC 5세기 중엽에 세워졌으며 일반적으로 그리스 건축의 3양식 중 

가장 단순한 도리아식이  최고로 발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파르테논이라는 이름은 이 신전과 관련이 있는 아테나 파르테노스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지시를 받아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감독을 받아 

건축가 익티노스와 칼리크라테스가 지었다. 

BC 447년 공사가 시작되었고 건물 자체는 BC 438년에 완성되었다. 

같은 해 페이디아스가 내부에 놓기 위해 금과 상아로 만든 아테나 여신상을 바쳤다. 

건물 외부장식 작업은 BC 432년까지 계속되었다. 

흰 대리석으로 지은 직4각형의 파르테논 신전은 수세기 동안 

대부분의 조각품을 잃어버리는 등 크게 손상되었지만 기본구조는 원상태로 남아 있다. 

주초(柱礎) 없이 네모난 주두(柱頭)를 가진 기둥이 

3단의 기단 위에 늘어선 콜로네이드[列柱]가 

지붕에 해당하는 엔타블레이처를 떠받치고 있다. 

 

기단의 맨 위층에서 잰 건물 높이는 30.89m이며 너비는 69.5m이다. 

파르테논 신전은 고도의 건축적 치밀함을 보여주는데, 

 서로 어우러져 조형적이고 조소적인 외관을 부여하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을 장식하고 있는 조각은 세심한 조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건물 자체의 치밀함에 견줄 만하다. 

 아테나 여신을 기리는 판아테나이아 축제의 연례 시민행진을 표현하고 있는데, 

양쪽으로 신들이 앉아 있고 아테나 신을 모시는 

남녀사제가 새겨진 동쪽 면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파르테논 신전은 페이디아스가 만든 거대한 조상이 철거되고 

그리스도교 사원으로 바뀐 5세기까지는 본질적 원형을 유지했다.

 7세기에 이르러 실내 일부가 개조되었는데,

1458년 아테네를 점령한 투르크인들은 파르테논 신전의 남서쪽 귀퉁이에 

미나레트(첨탑)를 세웠으나 그밖에는 변화 없이 그대로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1687년 투르크인과 싸우던 베네치아인들이 아크로폴리스를 포격하던 중 

파르테논 신전 안에 있던 화약고가 폭발해 건물 중심부가 파괴되었다.

1801~03년에는 그때까지 남아 있던 조각품 대부분이 투르크의 허락을 받은 

영국 귀족 토머스 엘진 경에 의해 철거되어 1816년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팔렸다. 

나머지 다른 조각들은 루브르, 코펜하겐 박물관 등에 있으나 

아직도 많은 수가 아테네에 있다.













 

에레크테이온 신전


에레크테이온은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또 다른 이오니아식 건물로서 

페리클레스가 세운 건설 계획 중 마지막의 것으로 

아테네의 신화적 영웅인 에렉테우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 되었다. 

색다른 평면과 외관을 갖추게 된 것은 대지가 부정형인데다 신전을 

여러개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에렉테이온은 계획대로 완성되지 않았다. 

원래 이 건물의 서쪽 단부는 더 연장되어서 

남쪽과 북쪽의 현관들이 건물의 중앙에 자리잡도록 계획 되었을 것이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바라본 사방의 조망



 

<왼쪽에 대극장 유적이 보인다.>

 

 

아레오파고스 [Areopagos]언덕

고대 아테네의 귀족회의가 열린 곳으로 유명한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있던 낮은 언덕을 칭했으나, 

 아레오파고스라는 이름은 의미가 넓어져 나중에는 그 회의 자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아레오파고스 회의는 왕의 자문위원회로 시작되어 

고대 초기에 아레오파고스 회의는 

드라콘의 법전이 공포될 때까지(BC 621경) 전반적이고 막연한 권한을 행사했다.


사도 바오로가 아테네를 방문하여 많은 청중을 대상으로 설교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본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신전>






 

 

 

소크라테스 감옥


필로파포스 언덕 필로파포스 기념유적 근처에 위치하며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은 후 이곳에 억류되어 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갇혀있던 감방>​

제우스 신전



고트족의 침입으로 인해 파괴되어 84개 돌기둥 가운데 

현재는 15개만이 남아 있는 코린트 양식의 건축물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그리스 최대의 신전이다. 

제우스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한때는 규모적인 면에서 

그리스 여느 신전들보다 웅장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과거의 그 융성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많이 파괴되어 있다.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본 아테네 야경



 









 

 


<하룻밤 숙식했던 아크로폴리스 바로 아래에 위치한 아테네 디바니 호텔>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그리스의 고린토 

그리스의 고린토

펠로몬네소스 반도의 관문이며  아테네에서 8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고린토는
고대의 영화를 누렸지만  지금은 구 고린토라 불리며, 

현재의 고린토 시내에서 8km정도 더 들어간 곳에 있었다.

그러나, 옛 고린토의 번영과는 달리 지금은 조용하고 작은 도시에 불과했지만, 

평화로움이 넘쳐나고 있었다.

 

아크로고린토스(코린토의 높은 바위)

아크로고린토스(코린토의 높은 바위)라 불리는 이 곳은 해발 575m에 있고 


일명'펠로포소스의 족쇄'라고 불릴 만큼 튼튼한 성채로 되어 있다.


 '에피라' 즉 관찰, 관측소, 경계는 의미로 B.C 7~6세기 경에 성채를 쌓았으며 


현재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보아 4세기 의 축조물로 보고 있으며 


성벽은 유스티니아노스 황제 때인 슬라브 족들의 침공 이전인 


A.D 583~586년 경에 다시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채의 길이는 2,000m에 이르며 성채 안에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어 


이 곳에 종사했던 제관과 천여명의 제녀에 의해서 종교라는 명목아래 자행되었던


 음행이 유행처럼 번져 외국인들의 발걸음 까지도 잡아 당겼다고 한다.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한 때 수 천명의 무녀들이 살고 있었으며 


을 내려와 매춘업을 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꽤 높은 앞산 정상에 성을 축조하고 신전을 짓고 음행이 이루어졌다.






<사진 왼쪽 길이 항구로 통하는 길>





<아폴로신전의 남아있는 7개의 돌기둥과 아치형의 서쪽 상가유적>



 



<박물관 옆의 폐허가 된 유적>




파괴된 유적의 잔해들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다.










코린토식 기둥 상부 조각

 


 

<바오로 재판터>








 

<우물과 목욕탕, 물저장고>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대리석 조각>

​<체육 시설이 있었던 넓은 터의 유적>

고린토 박물관​

아폴론 신전의 옆에 있는 박물관에는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는데 쓰인 


항아리, 술병, 화병, 물병 등이 있고, 


로마시대의 율리아 황제 가의 7개 동상과 신격화된 율리오스 황제의 모습, 


네로의 두상, 모자이크, 치료의 신인 아프로디테 신전 터에서 발굴된 조각 파편들

(환자들이 신전에서 나음을 받고 신께 감사의 표시로 환부들을 받들어 봉납한 것들) 


이 있다.



 

<박물관 뜰에는 목잘린 대리석상들이 줄지어 서 있다.>










 

<시체의 다리뼈를 꺾어 석관에 넣었다고 한다>

 











<네로 황제의 두상>




 

<타일을 섬세하게 붙여 만든 예술품> 

 








 

 


 

<쓸모있고 아름다운 질그릇 작품들>










고린토 운하 

 

고린토 만과 에게해의 사로닉 만을 연결하는 운하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BC 7세기부터 였고, 실제로 운하 건설을 시도한 사람은 67년 로마 황제 네로였는데 

그가 죽으면서 완성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 왕 조지 1세 때인 1881년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재정적인 어려움 등의 이유로 1893년에서야 완성되었는데, 

운하는 8m의 물깊이에 6.343m 길이, 그리고 24.6m의 폭이

 지상에서 해수면까지 높이가 79m이다.

 

1988년도 이 운하 위로 지나는 철도가 놓여져 동쪽 이스트미아(Isthmia)항구와 

쪽 포세이도니아(Poseidonnia)항구를 잇고 있다.

이 운하의 건설로 펠로폰네스 반도를 빙 돌아가는 700Km의 길이 단축되었으나, 

운하의 폭이 좁은 관계로 폭 16.5m 이하 바닥 깊이 7.3m 이하의 

배들만 운행이 가능하다. 

일 년에 1.1000척의 선박이 이 운하를 이용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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