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퇴팅 성모 경당

독일의 성모성지로 알려진 시청과 대성당이 있는 알퇴팅의 넓은 광장에는 

많은 기적을 일으킨 '검은 옷의 성모상'을 안치해 놓은 

8각형 모양으로 50여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성모경당이 있다. 

경당 4면의 회랑 천정과 벽에는 지난 500년 간 성모님의 전구로 치유 은혜를 입은

  순례자들의 소원과 감사의 봉헌 액자 5만여 개 액자들로 빈곳이 없다.


알퇴팅 대성당



알퇴팅 시청사와 중앙광장


시청 앞 광장의 성모자 상 석상


성 안나 성당






노이슈반슈타인(백조) 성

퓌센을 상징하는 노이슈반슈타인(백조) 성은

 루트비히 2세가 건축한 성으로

1869년 시작한 성은 17년 만에 완공되었으나

완공 직전에 왕위에서 쫒겨난 왕의 죽음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루트비히 1세의 성이 눈 아래 호수근처에 보인다.

17년간의 공사기간 중 겨우 102일을 거주하고 왕좌에서 쫒겨난 후 

3일 만에 뮌헨의 슈타른베이크 호수에서 시체로 발견된 루트비히 2세는 

동화같은 삶을 살기 원했으나 꿈이 좌절되었고,

현재는 아름다운 환경과 잘 어루러진 성을 보려는 관광객으로 붐빈다.

디즈니랜도 성의 모델이 된 성이기도 하다. 










동,서 독일로 나뉘어 져 있을 당시 수도 베를린이 동독 안에 위치하고 있어

서독 정부는 본을 수도로 정할 수 밖에 없었고,

독일 남부의 대도시인 뮌헨은 서독의 중심도시로 성장하였고

1972년 20회 올림픽에서는 아랍의 테러단체인 검은 9월단에 의해

이스라엘 선수단이 큰 희생을 치루기도 했다.


뮌헨 오페라 극장


운제러 리이벤 푸라우엔 대성당

성당 내에 바이에른 왕조의 루드비히 4세의 묘


뮌헨시 신청사-- 보기엔 구청사보다 더 낡아보인다.

시청사와 글로리겐슈펠시계--매일 오전 11시에 인형들이 춤추며 종을 울린다.


오른쪽의 붉은 색 지붕과 고깔 모양의 시계탑 건물이 구청사


뮌헨 올림픽에서 검은 9월단에게 희생된 선수들을 기리는 추모패








에탈 수도원과 아침미사

성지순례 여행의 첫밤을  에탈 수도원 앞 클로스테르 호텔에서 지낸 후

                              수도원 경당에서 아침미사를 봉헌하다.

눈 덮힌 알프스 산맥의 북단에 위치한 에탈의 아름다운 호텔에서 첫밤을 지내다.

 

에탕 수도원은 현재는 중고등학교로 쓰이고 있다고 함

 

1370년에 봉헌된 3개의 돔으로 이루어진 에탈수도원 대성당의 웅장한 모습 

 

대성당 옆에 새로 세워진 현대식 경당에서 순례여행  2일째 아침미사를 봉헌하다.

 

대성당의 화려한 내부 모습들.......

성 오틸리엔 대수도원

독일 뮌헨 남서쪽 약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 오틸리엔 대수도원은 한국과의 각별한 인연이 있다.

1909년 우리나라에 진출하여 한국교회 최초의 남수도원은 설립했고

지금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성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의 모태가 된 곳이다.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대성당 전경


 

대성당 앞뜰의 성모자상과 성당 안의 수난하신 예수님을 안고 비통해 하시는 성모상


성당 중앙제대와 뒷면의 파이프 오르간

 


수도자들과 주민 900여명이 공동체 생활을 하는 수도원

 

소성당에서 안명옥 주교님의 집전으로 성지순례 첫날 미사가 봉헌되다.






 



성지순례여행의 시작

4번째 해외성지순례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가톨릭신문 투어가 제공하는

'2018년 안명옥 주교(전 마산교구장)와 함께하는 동부유럽 성지순례'로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헝거리, 폴란드의 성지를 여행하는 상품으로

10여년 만에 성지순례여행을 하는 기대감에 가슴이 설렌다.


 

인천국제공항에 총 26명의 순례단이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기를

 이용하여 독일 뮌헨공항으로 직행하다.

 

비행기에서 본 신비로운 지구의 모습들

 

독일 뮌헨부근 상공에서 본 모습들......

 

뮌헨국제공항에 무사히 안착

성지순례여행으ㅔ 동행자가 될 대형관광버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이스탄불 ->인천공항(여행 마무리) 

터키 이스탄불에서 보거나 경험한

잡다한 사진들......


그랜드 바자르


비잔틴 시대부터 현재 그랜드 바자르가 있는 장소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후 터키가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서 1455-1461에 걸쳐 이곳에

 도시의 경제생활을 부강하게 만들 목적으로 두 개의 주 아케이드가 만들어진 이후

 사람들은 활발한 상업활동을 위한 더 많은 장소를 필요로 하였고 

그 결과 주 아케이드의 바깥부분까지 그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오토만 시대를 거치면서 지진,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던

 이 곳은 몇 번에 걸친 복구 끝에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18개의 출입구와 4천개 이상의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는

 세계의 가장 큰 바자르 중의 하나로 터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은 관광명소로 손 꼽히고 있다.





<그랜드 바자르의 액세사리 가게>


트램바이


트램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선 교통수단으로 
지상전철, 노면전차라고도 불리는 트램 Tramvay은 
말그대로 승용차와 같이 지상을 다니는 전차다.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되며 접근도 쉽고 이동이 가능한 

두 량씩 짝지어진 네 량의 차량이 편리하게 궤도를 운행하며 

교통신호도 똑 같이 따른다. 

 

이스탄불에서는 1872년부터 이용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아주 중요한 교통수단 중 하나로  이스탄불 시민들과 여행자들의 발이 되어주고 있다. 

 

 

수도교

로마시대부터 물을 끌어오기 위해 높은 성곽을 쌓고 수로를 만들었다






갈라타 타워 - GALATA KULESI


 이 타워는 6세기경 '그리스도의 탑'이라는 이름으로 비잔틴 제국에 의해 

건축되었던 것이나 14세기 제노아에서 이주해온 민족들이 자신의 자치령에 따라 

재건한 것으로 지역의 이름을 따라 갈라타 타워로 개명되었다.

오스만 제국시대이던 1446년에 타워의 상층부가 추가되면서 

그 모습은 급격히 변화하게 되었으며 시대가 흐르면서 

이 곳은 감옥, 화재감시탑, 해상감시탑 등 그 용도면에서도 다양하게 이용되어졌다. 

현재 갈라타 타워의 높이는 63미터로, 

가장 높은 곳의 두 층은 전통쇼를 가미한 레스토랑으로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지하저수조(예레바탄 지하 궁전) 


건설에만 무려 7,000여 명의 노예가 동원되었던 지하 저수지인 

예레바탄 지하 궁전은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건설되었다. 

지하 궁전은 길이 143m, 폭 65m, 높이 9m에 달할 정도로 웅장한 크기를 자랑한다. 

항상 전장(戰場)이었던 이스탄불은 안정적인 물 공급이 필요하여 

저수지를 많이 만들었는데 그 당시 저수지 중 

규모가 가장 컸을 뿐만 아니라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저수지로 사용된 이곳이 지하 궁전이라 불리게 된 것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돌기둥 때문인데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총 336개의 아름다운 대리석 기둥은 각지의 신전에서 운반해 온 것들이다.

 1885년 이곳은 복원 공사를 거쳐 조명, 음향 시설 등을 설치하고

 여행객들을 위한 보도를 만들었다. 

이 시기 저수지에서는 거꾸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가 발견되었다. 

메두사가 거꾸로 놓인 이유는 메두사의 눈과 마주치면 돌이 되어 버린다는

 전설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지하 저수지들는 레스토랑, 콘서트 무대 등으로 사용되면서 

시내의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지하저수지 출입인 지상 건물



지하저수지의 돌기둥들



거꾸로 놓인 목 잘린 메두사의 머리 조각품




 

이스탄불 오벨리스크


술탄아흐메트모스크 맞은편에는 비잔틴 시대에

 전차경주를 하던 원형경기장인 히포드럼 광장이 있다. 

이곳은 "U"자 형태의 큰 경기장이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고 이집트 오벨리스크와 뱀기둥, 콘스탄틴기둥 분수대 등의

 유적들만 남아있는데 고대 도시의 심장부였던 굉장히 의미있는 곳이다.

10만명 관중을 수용할 수 있던 경기장이니 규모가 감히 짐작되지 않는다. 

검투경기장이었다가 검투가 금지되고 대전차경기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거대한 오벨리스크와 뱀기둥이 있는 히포드럼(경기장)은 블루모스크 앞에 위치해 있다.

양갈비로 마지막 점심을 먹은 터키음식점




보스포러스 제1대교 야경 

보스포러스 제1대교는 아시아와 유럽  대룩을 잇는 다리로 

사람이 통행할 수 없도록 제한이 되어있으며  

1970년 착공해서 1973년 10월 23일  

터키공화국 수립 50주년에 맞춰 개통한 다리로 길이는 1560m이다.


 사람들의 통행을 제한 이유는 다리위에서 자살자들이 많은 이유로 금지시켰으며 

 인천대교와 마찬가지로 운행 중 차에서 내랄 수 없도록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자살기록 4위를 기록한 이 다리에서는 2001년에 146명이 뛰어내려 24명이 사망했고, 

듬해에는 190명이 뛰어내려 이 가운데 38명이 목숨을 잃었다.  



갈라타다리 아래 즐비한 레스토랑에서 바라본 제1교의 야경




갈라타다리 아래 레스토랑에서 시원한 맥주 파티



에니 모스크의 야경

갈라타 다리 위 레스토랑에서 본 애니모스크의 야경





휘엉청 밝은 달이 하늘 구름에 걸리고

 

이스탄불 옛 성곽과 망루들의 모습








가죽 옷 공장 패션 쑈








가죽옷 전시 판매장

 




<성지순례 여행 마지막 저녁식사를 한 한식당>


한식당에서 관리하는 길고양이들





탑승하기 전의 이스탄불 국제공항에서




10여시간의 비행 끝에 인천공항에 안착하다.


우리나라 인천공항 상공에 도착하다.


<15일간의 성지순례여행의 추억을 간직하고 아쉬운 작별의 시간....>





<15일간의 성지순례여행의 추억을 간직하고 아쉬운 작별의 시간....>







 

이번 터키,그리스 성지순례 여행

사진정리 및 블로그 등재를 마무리 했다.

긴 일정에 순례한 곳이 많아 기억이 잘 나지 않고

내용도 정확하지 못한 것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이번 여행에서는 정감 넘치는 현지인들의 친절함과

양식이지만 대체로 입맛에 맞는 음식,

폐허가 됐지만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유적들과 문화재들,

 

유식하고 친절한 터키 가이드 이은경 아가다 씨와

그리스 가이드 조동규 목사님의 친절한 안내가

오랫까지 기억돨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부님이 집전하는 매일미사에 참례는 

성지순례 여행 원천의 힘을 부여해 줬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이스탄불 코라 구세주 성당 (The Chora Church) 

 

코라 구세주 성당 (The Chora Church) 


코라 구세주 성당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성밖에 세워졌다. 

'교외, 도시 근교의 시골' 을 뜻하는 그리스어 Chora의 발음이 변하여 

카리예(Kariye)가 되었고, 현재는 카리예 박물관(Kariye Museum)으로 이용되고 있다. 



프레스코 (Fresco)화

프레스코 (Fresco)는 a fresco (방금 회를 칠한 위에) 라는 

이탈리아어에서 나온 낱말로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많이 

그려진 벽화를 일컫는 단어로 프레스코는 인류 회화사에서 

아마 가장 오래된 그림의 기술 혹은 형태로 여겨진다.

 

기원전 약 3000년에 미노스문명의 중심지인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의 벽화는 

프레스코의 기술로 그려졌으며, 기원전 5세기 이래 중국, 한국, 일본에서도 

그려진 불교의 대부분의 벽화는 프레스코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삼한시대의 고분벽화 역시 프레스코의 기술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도 베드로


메인 돔 천정 한가운데 아기예수님을 안은 성모화와 주위를 둘러 싼 사도들

 





이집트로 피신하는 성가정



























아시아 대륙 끝 위스크 다르에 위치한 코라 성당은

 558년의 대지진때 완전히 파괴되어 유스티아누스 황제( 527-565년)가 개축하였다.

현재 성당의 원형은 비잔틴 왕조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소스(1081-1118)의 

장모 마리아 듀카스(Maria Dukas)에 의해 1077-1081년에 세워졌다. 

그 후 안드로니코스 2세의 총리 테오도레 메토키데스가 

1315-1321년 현관과 부속경당을 증축하고

 내부의 천정과 벽에 성경의 내용을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로 장식했다. 

특히 테오도레 메토키데스가 예수님께 성당을 바치는 모자이크도 남아 있어

 당시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으나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된 이후 

탄압으로 파괴되고 개축되어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다. 

오스만 제국의 건축가 시난이 성당의 중력을 지지할 목적으로 

16세기에 4개의 미나레(Minaret, 이슬람 사원 첨탑)를 외부에 세운 후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성당에는 중앙(Naos)의 메인 돔을 포함해 5개의 돔이 있다. 

성당 중앙(Naos)은 내부 나르텍스(Narthex, 출입문에서 성당 중앙을 연결하는 현관 홀)

와 연결되고 중앙 문을 통과하면 내부 나르텍스(성전 중앙으로 들어가는 내부 입구, 폭4m, 길이18m)가 있는데 구조적으로 내부 나르텍스는 창을 만들 수 없어 볼트(Volt, 비닐하우스 형태)형 천장에 두개의 돔을 만들어 돔과 볼트 사이에 채광창을 만들었다. 

이 채광창을 통해 돔 천장의 황금빛 모자이크에 반사되는 빛은

 경외감과 신비감을 자아낸다. 

외부 나르텍스 (전체 건물 외부 입구, 폭4m, 길이23m)

천장에는 모자이크로 된 성화가 그려져 있다.

이슬람 정복 이후 성당 내부에 있던 성경의 중요 내용을 그린 

아름다운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들은 회반죽을 덮여 

이슬람 사원으로 오랫동안 이용되었으나 

1948년 이후 복원되어 건립 당시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고 있다. 

그 가운데 부속경당의 <최후의 심판>, <부활> 등 모자이크와 벽화는 

비잔틴 후기의 명작으로 순례자들의 경외감을 자아낸다. 



건축 당시의 조감도 --이슬람 사원의 첨탑 마나레가 없다.





 

<16세기에 세워진 네 개의 미나레(Minaret, 이슬람 사원 첨탑)​중 하나>

<성당 입구에서 본 내부의 모습>

<메인 돔의 아기 예수님을 안은 성모님 주변을 사도들과 성인들이 둘러 싼 성화>





 성경의 중요 내용을 그린 아름다운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









 


 

가득 채워져 있어 화려하기 그지 없다.


중세인들의 신앙심과 열정과 노력에 경외심이 엄습한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이스탄불 주교좌성당과 마리아성당 

이스탄불 주교좌 성당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주교좌 성당에서 10년간 사목하셨다고 함>


주교자 성당에서 순례자 미사봉헌









이스탄불 성 마리아성당에서 교민들과 합동미사​















순례단 지도 김성태 신부의 미사집전에 교민들이 감동한 것 같다.

















교민 꼬마 교우들의 순레단 환영 노래와 율동공연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이스탄불 보스포러스해협

보스포러스 해협 (Bosphorus Straits)


  보스포러스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해협으로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는 

            길이 약 30km, 넓은 곳 폭 3500m, 좁은 곳이 700m로, 

          물 흐름이 세차서 해협 안 여기저기에서 물소용돌이가 치고 있다.

 양측 해안에는 고대 유적지, 그림같이 아름다운 전통적인 터키 마을, 

울창한 숲 등이 곳곳에 있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으며 

음식점, 찻집, 별장 등이 있는 매우 조용한 곳이다. 


고대와 중세까지만 해도 지중해와 흑해간의 거의 모든 상거래는 

이 해협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무역에 있어 보스포러스 해협의 중요성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져 

매년 38,000여척의 배들이 이 곳을 통과하고 있다.
이 해협 대교는  인근 지역과 이스탄불의 야경 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힌다.  


보스포러스해협 관광유람선 선착장이 있는 갈라타 브릿지 부근​

<갈라타 다리와 유람선>


왼쪽 언덕 위에 갈라타타워,오른쪽에 에니모스크가 보인다



보스포러스 제1대교


<보스포러스 제1대교와 대교 아래 이슬람 사원은 관광명소라고 함> 




<제1대교 유럽쪽 언덕 위의 고급 주택들과 호화요트>


터키의 잘 보이는 곳에는 대형국기 게양대에서 터키기가 펄럭인다. 


 

보스포러스해협 제2대교



유람선에서 본 갈라타 다리 부근의 선착장과 애니모스크




<유람선에 본 성 소피아성당>


<유람선에서  돌마바체  궁전> 




전에 해군사관학교로 쓰다가 현재는 수산고등학교로 사용하는 건물



제1대교 아래를 통과하면서...





왕실의 여름별장


보스포로스 해협 관광 유람선과 제1대교

.



왼쪽의 높은 탑이 갈라타 타워


돌마바체 궁전앞 동마바체 모스크와 대형시계탑


<아시아 쪽 해변에 위치한 이슬람 사원>


돌마바체 모스크 뒷편의 대형 쇼핑몰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톱카피 궁전

돌마바흐체 궁전 (DOLMABAHCE PALACE) 

가득찬 정원이란 뜻의 돌마바흐체 궁전은 해변을 흙으로 메꾸고 세운 곳이다. 

50만 금화, 즉 현재 돈 5억불에 맞먹는 기금으로 건립된 이 궁은 1856년 완공되었는데, 궁의 내부 장식과 방들을 꾸미기 위해 총 14톤의 금, 40톤의 은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3층의 대칭구조로 지어진 궁의 내부에는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 280개의 화병, 

156개의 다양한 시계, 4톤과 2톤 중량의 샹들리에를 포함한 36개의 샹들리에, 

58개의 크리스탈 촛대, 560점 이상의 그림과 

손으로 직접 짠 대형 카페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급격히 악화되어가는 시점에서 이를 만회하고자 

서구화를 추진하고 국력 쇄신을 도모하던 압두메짓 1세가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해 초호화판으로 이 왕궁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결국 막대한 건축비 지출은 어려웠던 왕실 재정을 더욱 악화시켜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호화로운 궁전의 정문>




잘 꾸며진 정원




<궁전의 부속건물로 들어가는 문>


돌마바흐체 궁전 중앙 출입구

 

<돌마바흐체 궁전은 보스포러스 해안의 연약지반에 건설했기 때문에 

 속은 가벼운 나무 위에 석재를 덧씌워 건축자재로 썼다고 함>


<궁전 울타리 밖이 바로 보스포러스 해협이다.>



<멀리 언덕위의 사원이 블루 모스크(?)다>


<궁전 앞의 거대한 시계탑과 뒤편의 돌마바흐체 모스크>



갈라타 다리


갈라타 다리 아래 관광선 접안 부두


갈라타 탑


<보스포러스해협 제1교 >

갈라타 다리 옆에 위치한 애니 모스크



톱카프 궁전 

오스만 제국의 술탄(황제) 메메트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처음 건설한 톱카프 궁전은 15세기경부터 400여 년 동안 오스만 터키 제국의 

최고 권력자였던 24명의 술탄들이 거주하던 왕궁으로, 

성 소피아 성당 바로 뒤편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고전적인 오스만 풍의 건축양식으로 건설한 이 궁전은

 1856년 돌마바흐체 궁전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이스탄불 최대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터키어로 톱(Top)은 대포를, 카프(Kapi)는 문을 의미하는데 

옛날 이 궁전의 문앞에 커다란 대포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전체 면적이 21만평이나 되는 톱카프 궁전은 5k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28개의 탑에 입구는 바다 쪽에 3개 내륙에 4개이다.

당시 이 궁전 안에는 왕족과 귀족들, 

그리고 하인과 병사 등 약 5,000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관람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궁전은 4개의 문에 의해서 4개의 정원으로 나누어 진다.



<제1문인 경건의 문- 무료입장>

​<톱카프 궁전의 배치도 모형> 



<6세기 경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건립한 궁내 유일한 이레네성당>



<제2문인 황제의문 - 유료 입장>
 


튼튼한 성벽과 초소




<술탄의 여인들의 통태를 감시하던 궁정에서 제일 높은 감시탑>
 


<술탄과의 대화를 엿듣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물꼭지>


<대신들과 국사를 의논하던 다완(내각)건물>



<제 4정원에서 바라본 보스포러스 해협과 제1교>


<궁전의 이슬람 사원>



왈실의 다양한 보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변한 왕궁 건물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이스탄불 성 소피아성당, 블루 모스크 


성 소피아 성당(아야 소피아 박물관)

 

성 소피아 성당은  이스탄불에 산재해 있는 여느 모스크와 비슷해 보인다. 

간혹 사람들은 마주 보고 있는 블루모스크와 아주 흡사하다고 느낄 것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현재 성 소피아 박물관이라는 정식 명칭을 가지고 있지만, 

이곳은 최초에는 성당이었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규모 면에서도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성 소피아 성당은 오늘날까지도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공인하고 이곳에 머물기로 정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새로운 도시의 큰 사원'으로 325년 창건했던 성 소피아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에 따라 532년-537년에 다시 크게 개축되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성 소피아 사원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이후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이곳은 회교사원, 

즉 모스크로 그 용도가 바뀌면서 성당을 둘러싸는 미나레트가 세워지고, 

성당 안벽은 회칠로 덮이고 그 위에 이슬람교 코란의 금문자와 문양들로 채워졌다. 

회칠 속으로 성모마리아의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들은 모두 사라졌다.

1934년 성 소피아 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정식 명칭을 바꾸면서 복원작업이 진행되어 

두꺼운 회칠을 벗기자 성모마리아를 비롯한 비잔틴 시대의 화려한 흔적들이 드러났다.

성 소피아 성당의 중앙에 서면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공존하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는 역사적인 장소임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본당의 넓이는 75m X 70m로 7,570평방미터에 달하고 천장높이는 55.6m, 

돔의 지름은 33m에 달하여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높이이며 

40개의 대형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자연채광구조이다. 

또한, 영국 텔레그래프 선정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10선에 선정된 곳이다.

여러 각도에서 본 성 소피아대성당의 외관​










성당 서쪽의 입구 -- 이슬람의 파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중앙의 큰 출입문은 왕이나 황제의 전용문​ 


기계로 자르지 않았는데도 대리석 문양이 완전 대칭을 이루고 있는

 벽의 대리석  대형타일


아직도 복원 작업이 진행중인 철 구조물과 그물 때문에 경관이 어수선하다.









중앙 돔의 가장 높은 천정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님의 천정화


천정 돔을 떠바치는 기둥상단에 대형 회교문자가 분위기를 어지럽힌다.


기둥 위 아름다운 문양의 조각

내부의 천정 모습들 

 

 

중앙 돔의 이슬람 문양 - 회칠 안에 어떤 성화들이 숨어 있을까??


성서 문구를 모자이크화로 표현한 작품들




빛에 반응하는 특수한 타일로 제작된 예수님과 성모님 성화





베드로 사도(?)의 모습







경사로를 걸어 2층으로 올라가 1층 사원 출입구를 내려다 본 모습


소피아사원 관람 후 나오는 남쪽 출구


 

블루 모스크 - Blue MOSQUE

 

오스만 시대에 지어진 직경이 27.5m, 높이가 43m에 다다르는 

술탄아흐멧 모스크는 규모면에서 터키 최대의 것으로,

 맞은편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우위를 상징하기 위해 

그 양식을 모방, 발전시켜 건축한 독특한 형상의 회교사원이다. 

 내부 벽과 기둥이 푸른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블루 모스크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다. 

돔의 200개가 넘는 조그만 창은 스태인드 글래스로 장식되어 있어 

이를 통해 들어오는 아름다운 햇살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내부 천정과 벽면에 섬세한 이슬람 문양이 화려하다.


참배할 때 여성들은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야 한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그리스 출국, 터키 재입국

 

그리스 성지순례 마지막날 아침,

카발라 루시호텔에서 아침 6시에 미사를 봉헌하고

식사 후 8시에 출발하였다.

그리스와 터키 국경도시 압살라에서 간단한 출입국 수속 후  터키 땅을 다시 밟다.


<그리스 출입국 사무소>


<터키 입국 통과대>







<터키에 재입국하여 한적한 고속도로를 달리다>




터키의 어느 항구도시 식당에서의 늦은 점심식사




<사진 찍히기를 좋아하는 터키인들과 공연비를 받는 즉흥연주>




<지붕 위에 집열판과 온수 탱크가 설치된 전형적인 터키의 주택>



회교 국가답게 어디에나 이슬람 사원을 볼수 있다.

...사원의 첨탑이 1이면 주민들의 공동설립 사원

                                            2이면 부자가 지역민에게 기증한 사원

                                            4이면 국가(슐탄)가 ​건설한 사원으로 구분되며,

                                성직자는 국가에서 임명하고 관리한다고 한다.








<흰색의 벽에 붉은 기와의 주택들이 주변과 잘 어울린다.>




<다시 이스탄불에 들어오자 신시가지가 눈에 띈다.>




<터키에도 아파트 건설 붐이 한창이란다>




넓은 국토를 가진 날인진 몰라도 초고층 아파트는 눝에 띄지 않는다





<복잡한 고속버스 터미널-국토가 넓어 며칠이나 걸리는 노선이 있어 기사가 2명이란다>

이스탄불 시내 곳곳에 옛 성곽 잔재를 쉽게 볼 수 있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리디아기념성당,카발라 

 


테살로니카에서 카발라로 이동하는 중간 암피폴리스 부근의 시골식당에서 중식


 

암피폴리스 사자상: 

알렉산더(헬레니즘시대)시대에만들어진 사자상으로  2300년이 넘어

사도 바오로 시대에도 존재했었던 사자상이며 

지금도 국도변에 이렇게 자리하고 있다.



필리피 리디아 입교 기념성당

바오로 사도가 유럽땅에서 입교시킨 첫 번째 교우가 

바로 티아티라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였던 리디아라는 여인이다.

바오로 사도는 원천적으로 교우들의 물질적 도움은 사양했지만 

리디아의 간곡한 요청에 의해 리디아집에 머물며 전교활동을 했다. 

리디아 입교성당은 아담하면서도 외관이 매우 아름답고 

내부는 천정과 벽은 수많은 성화들로, 

그리고 바닦은 회색계통의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성당 앞은 너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유적의 파편들이 나뒹굴고 

그 앞에는 계곡물이  흐르는 리디아 세례터가 있다

 

그곳에서 야외미사를 봉헌하며 유럽 최초의 그리스도교인이었던 

리디아의 신앙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리디아 기념성당 앞의 풍경 -- 유적의 잔재가 너부러져 있다.

아담하면서 톡특한 외양의 리디아 기념성당


리디아 세례터에서 야외미사를 봉헌하다.


그리스 정교회 성당답게 내부는 온통 성화들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카발라 (그리스)

카발라(그리스어: Καβάλα)는 그리스 북부 에게 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동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 주에 속하는 현인 카발라 현의 현청이 있는 항구도시다.

  바오로가 제 2차 선교여행때 토로아스를 출항하여 이 항구에 상륙한 후

약 20km 떨어진 필리페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바닷가에 위치한 투숙한 백색의 루시호텔>




<호텔 앞 작은 해수욕장에서 해수욕을 즐기고.........>



이곳도 길냥이들의 천국 같다.


휘영청 보름달이 예쁘고 야경도 아름답다.


<이번 여행에서 제대로된 일출과 일몰을 감상할 수 없는 아쉬움이 크다.>

이튿날 아침 일출시간대의 카발라


 호텔에서 새벽미사 봉헌

출발직전 호텔 앞의 풍경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테살로니카 성디미트리성당

성화 제작소 방문

수사님들과 여성분들이 순전히 손으로 그리는 성화는 정교하고 값이 꽤 비싸다.





이 분이 제작한 성화를 구매하면  직접 사인해 준다.





제작 전시된 성화와 이콘들
 

 

구름 덮힌 그리스 최고봉인 올림푸스 산(해발 2717m)











 

성 디미트리오스 성당(그리스 정교회) 

 

성 디미트리오스는 A.D.303년 디오클레시아누스 치세때 혹은 A.D.306년 막시미아누스

 치세때 헝가리 시르미움에서 순교한 분으로 테살로니카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당시 23세로서 군인인 디미트리오스는 그리스도교인 박해때 

그리스도인들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막아 나섰다가 잡혀 순교한 분이다.

그가 죽자 유골함에서 기름이 흘러 내려 그 기름을 발랐던 

많은 사람들이 치유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리스도교 박해때 여러 신자들과 병사들의 꿈에 나타나 

 테살로니카 도시를 파괴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5세기에 지은 성당은 7세기에 재건되었으나 

 1917년 도시의 화재로 거의 소실되고 후 지금의 성당이 재건되었다. 

그리스에서 가장 큰 정교회 대성당이다. 







<성당 앞 왼쪽 뜰에 마련된 수사님의 무덤>

성 디미트리오스 성당의 화려한 내부





























<치유 기적이 일어난 성 디미트리오스의 유골함>

성당의 지하 유적들​








 

 



<테살로니카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과 성곽의 문 유적>
 

 

 White Tower(Lefkos Pyrgos)

  


데살로니키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 중 하나로 15세기 베네치아 사람들이 세운 

성의 일부로 망루(?)로 사용했으나,

 18~19세기 터키의 오트만제국 시대에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이곳에서 대량 학살이 벌어져 "피로 물든 탑"이라 레드 타워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 후 탑의 표면을 하얗게 칠해 화이트타워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현재는 비잔틴 시대의 유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테살로니카의 현대적인 조망탑>



그리스 인구의 98%가 국교인 그리스 정교도라 동네마다 정교회 건물들이 중심이다.

마치 이슬람사원이 터키 마을의 중심이듯이.........

암피폴리스 사자상 (Lion of Amphipolis)

도로 가에 외롭게 서 있는 사자 조형물은 기원전 2세기 경에 

블록으로 만들어진 좌대위에 앉아있는데, 

이 사자상은  미들리니(Mytilene)섬의 선원이었다가 후에 

시리아의 총독이 된 라오메돈(Laomedon)을 기념하기 위해 것이라 추정된다. 

이 블록은 1936-37년 조각나 있던 것을  다시 조립한 것으로 

스트리몬 강에서 건져낸 것인데 아마도 중세때 

스트리몬 강의 댐을 만드는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그리스 메테오라 수도원

세계 복합문화유산  메테오


 

세계 복합유산으로 지정된 메테오라는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는 수도원'이라는 뜻이며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 위에 세워져 있어 '하늘의 기둥'으로도 불렸다.

한때 스물세 개의 수도원이 세워졌으나 불안정한 지반 때문에

 18세기 말에 대부분 무너졌고  

현재는 수도원과 수녀원을 합해 여섯 곳 만이 남아 있다. 


 바위들의 평균 높이는 300m, 가장 높은 것은 550m나 되니 

수도원들은 정말로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이다. 

메테오라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 중부 테살리아 지방 

북서부 트리칼라 주의 바위 기둥들과 

그 위에 세워진 수도원을 통칭하는 말이다.


<메테오라에 진입하면서 차에서 촬영한 웅장한 바위산>

양갈비 점심식사를 한 식당에서 촬영한 사진들.......








메테오라 수도원 올라가는 험로에서 촬영한 차창사진들.........









           바를라함 수도원(The Holy Monastery of Varlaam)    


바를라암 수도원은 메테오라에서 대 메테오른 수도원에 이어 

두번쩨로 큰 수도원으로 1541년에서 1542년에 세워졌다. 

은둔한 수도자 바를라암에 의해 세워졌으며, 

후에 그의 이름을 따서 바를라암 수도원이라 불리웠다.

예수, 마리아, 베드로, 바오로, 싯소이스 벽화가 유명하다.

















 

성 스테파노 수녀원 

 

성 스테파노 수녀원은 다른 수도원들과 비교해 작은 편이지만 

메테오라의 수도원들 중 가장 잘 보존되어 현재 수녀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는 16세기 중반에 세워진 1개의 작은 본당이 있는 

성 스테파노스 교회가 있으며 사마리아 여자(요한4 ), 

물고기 잡이 기적(요한 21 )벽화들과 감탄이 절로 나는 황금 잎새 조각상과 

성 카랄람보스의 성스러운 두상이 은그릇에 보관되어 있다.

 

 

<수녀원에서 내려다 본 메테오라 시가지>

성 트리니티 수도원(The Monastery of Holy Trinity)  


 

가장 관람하기 어려운 수도원으로 입구에 도착하기 전에 

방문자들은 계곡을 건너서 바위를 지나 위로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1476년 수도사 도메티우스에 의해 세워졌으며, 

이곳 교회에는 서투르게 그려진 벽화(200년후에 추가됨)가 보존되어 있다. 

두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돔으로 된 이 교회는 

1475년에서 1476년에 세워졌으며, 십자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트리니티 수도원은 정원과 구조물이 서로 분리되어 

그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으며, 

멀리 눈으로 덮힌 핀도스 산맥이 바라다 보인다.
 속세와의 차단을 위해 물자 보급과 사람들의 출입은 

도르래를 이용해 광주리에 담아 끌어올리거나 

밧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거나 하였으나 

1925년에 돌을 쪼아 140계단을 만들었으므로 지금은 걸어서 올라간다.

사진 우상 귀에 도르래 장치가 보인다.




 

 

 

 


 

 

 



<수도원 창립자가 최초로 수도했던 곳>
 



수도원 내부-공구실,와인통,수도사 유골실,




 

수도원 내부의 성화
 

 

 

 

 

 

<수도원 주방의 기구들>

<메테오라 호텔 디바니>

호텔 뒷편에서 촬영한 메테오라 암벽산
 

 





메테오라에서는 냥이들도 수도를 하나??

 







메테오라 시내의 모습들





 

 

 


<아테네에서 메테오라 가는 고속도로의 요금소와 주변 풍경>
 

 

페르시아 전쟁 때 그가 그리스 중부 테르모필라이의 협로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군을 맞아 용감히 싸운 이야기는 그리스 사람의 용기를 나타내는

 전설이 되었으며 서유럽 역사를 통틀어 영웅적 용감성의 전형으로서 칭송되었다. 

네오니다스는 아기스 왕가 출신으로 BC 490년경 

이복형제인 클레오메네스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클레오메네스의 딸 고르고와 결혼했으며 클레오메네스가 

다른 그리스 도시들을 공격하는 것을 도왔던 것으로 보인다. 

BC 480년 소규모 그리스 군대를 거느린 그는 테르모필라이를 지나 전진하려는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의 대군과 맞섰다. 

2일 동안 페르시아의 공격을 견뎌낸 다음 대부분의 군사를 철수시키고 

친위병 300명과 함께 남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다 죽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에 큰 감명을 받았고 

스파르타인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는 전설이 여기서 생겨났다.(영화 300의 원전) 

,그리스 중부 테르모필라이에 있는  레오니다스장군(스파르타왕) 동상>



<유구한 역사를 가졌으며 히포크라테스가 사망한 그리스의 중부도시 라미아>


<메테오라에서 유명한 양갈비식당인 테아 - 한글이 반갑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그리스 아테네 


아테네 [Athens]그리스의 고도(古都)이자 수도.

서구 문명의 발생지이며, 고전 문명의 많은 지적·예술적 사상이 비롯된 곳이다. 

외항 피라이우스가 있는 에게 해의 팔레론 만 연안으로부터 8㎞ 떨어져 있으며, 

동쪽의 페탈리온 만과의 사이에는 히메토스(이미토스) 산맥이 가로지르고 있다. 

 대(大)아테네는 지금의 그리스에서 하나의 디아메리스마(행정지역)를 이룬다. 

기후는 온대성으로 겨울은 온화하고 여름은 덥고 건조하다. 


아테네는 무엇보다도 고대의 신전과 공공건물들로 유명하다. 

그중 이 도시의 수호 여신인 아테나를 위해 세운 직사각형의 원주식 신전인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그리스의 도리아 양식 건축물 가운데 백미로 꼽힌다. 

파르테논이 있는 아크로폴리스에는 원래 아테나와 포세이돈의 신전이었던 

에렉테움과, 아크로폴리스의 벽을 통해 입구가 이어지는 프로필라이아신전도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기슭 남쪽에는 헤로데스 극장과 디오니소스 극장이 있고 

북서쪽에는 고대 장터였던 아고라가 있다. 

아고라 부근에서 발굴된 거리들과 아크로폴리스 북쪽 사면의 화려한 플라카 지구에 

고대 아테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국회의사당 건물 부근에는 국립공원과 신타그마(헌법) 광장이 있다. 

특히 광장에는 고급 호텔과 카페들이 많아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중요 박물관으로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국립고고학 박물관, 비잔틴 박물관이 있고, 

학술기관으로는 아테네대학교(1837 재설립), 그리스 아카데미, 국립도서관이 있다.


 


하드리아누스 문 - Hadrian's Gate, Athens  




신타그마 광장에서 도보 7분 거리에 옛 그리스 마을과 새 로마인 마을을 구분지었던 

히드라이누스의 문이 있다. 

131년 히드리아누스 2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문으로 높이는 18m, 

너비 약 13m의 건물이다.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

그리스 아테네 모나스트라키 광장 주변에 있는 아크로폴리스는 
높은(akros) 도시(polis)라는 의미로 폴리스의 수호신을 모시는 
여러 신전들이 세워져 있는데, 
현재는 한장의 티켓으로 아크로폴리스 고고학 박물관, 아고라, 디오니소스극장, 
로만 아고라, 제우스신전을 입장할수 있다. 

아크로폴리스 입구의 오른쪽에 위치한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은
 6,0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현재도 매년여름철 아테네 페스티벌을 비롯해서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 등이 열린다.

 
 


                                    <아크로폴리스 출입문> 
 

파르테논 신전 [Parthenon  神殿]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있는 아테나 여신의 주(主) 신전으로 

BC 5세기 중엽에 세워졌으며 일반적으로 그리스 건축의 3양식 중 

가장 단순한 도리아식이  최고로 발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파르테논이라는 이름은 이 신전과 관련이 있는 아테나 파르테노스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지시를 받아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감독을 받아 

건축가 익티노스와 칼리크라테스가 지었다. 

BC 447년 공사가 시작되었고 건물 자체는 BC 438년에 완성되었다. 

같은 해 페이디아스가 내부에 놓기 위해 금과 상아로 만든 아테나 여신상을 바쳤다. 

건물 외부장식 작업은 BC 432년까지 계속되었다. 

흰 대리석으로 지은 직4각형의 파르테논 신전은 수세기 동안 

대부분의 조각품을 잃어버리는 등 크게 손상되었지만 기본구조는 원상태로 남아 있다. 

주초(柱礎) 없이 네모난 주두(柱頭)를 가진 기둥이 

3단의 기단 위에 늘어선 콜로네이드[列柱]가 

지붕에 해당하는 엔타블레이처를 떠받치고 있다. 

 

기단의 맨 위층에서 잰 건물 높이는 30.89m이며 너비는 69.5m이다. 

파르테논 신전은 고도의 건축적 치밀함을 보여주는데, 

 서로 어우러져 조형적이고 조소적인 외관을 부여하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을 장식하고 있는 조각은 세심한 조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건물 자체의 치밀함에 견줄 만하다. 

 아테나 여신을 기리는 판아테나이아 축제의 연례 시민행진을 표현하고 있는데, 

양쪽으로 신들이 앉아 있고 아테나 신을 모시는 

남녀사제가 새겨진 동쪽 면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파르테논 신전은 페이디아스가 만든 거대한 조상이 철거되고 

그리스도교 사원으로 바뀐 5세기까지는 본질적 원형을 유지했다.

 7세기에 이르러 실내 일부가 개조되었는데,

1458년 아테네를 점령한 투르크인들은 파르테논 신전의 남서쪽 귀퉁이에 

미나레트(첨탑)를 세웠으나 그밖에는 변화 없이 그대로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1687년 투르크인과 싸우던 베네치아인들이 아크로폴리스를 포격하던 중 

파르테논 신전 안에 있던 화약고가 폭발해 건물 중심부가 파괴되었다.

1801~03년에는 그때까지 남아 있던 조각품 대부분이 투르크의 허락을 받은 

영국 귀족 토머스 엘진 경에 의해 철거되어 1816년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팔렸다. 

나머지 다른 조각들은 루브르, 코펜하겐 박물관 등에 있으나 

아직도 많은 수가 아테네에 있다.













 

에레크테이온 신전


에레크테이온은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또 다른 이오니아식 건물로서 

페리클레스가 세운 건설 계획 중 마지막의 것으로 

아테네의 신화적 영웅인 에렉테우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 되었다. 

색다른 평면과 외관을 갖추게 된 것은 대지가 부정형인데다 신전을 

여러개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에렉테이온은 계획대로 완성되지 않았다. 

원래 이 건물의 서쪽 단부는 더 연장되어서 

남쪽과 북쪽의 현관들이 건물의 중앙에 자리잡도록 계획 되었을 것이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바라본 사방의 조망



 

<왼쪽에 대극장 유적이 보인다.>

 

 

아레오파고스 [Areopagos]언덕

고대 아테네의 귀족회의가 열린 곳으로 유명한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있던 낮은 언덕을 칭했으나, 

 아레오파고스라는 이름은 의미가 넓어져 나중에는 그 회의 자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아레오파고스 회의는 왕의 자문위원회로 시작되어 

고대 초기에 아레오파고스 회의는 

드라콘의 법전이 공포될 때까지(BC 621경) 전반적이고 막연한 권한을 행사했다.


사도 바오로가 아테네를 방문하여 많은 청중을 대상으로 설교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본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신전>






 

 

 

소크라테스 감옥


필로파포스 언덕 필로파포스 기념유적 근처에 위치하며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은 후 이곳에 억류되어 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갇혀있던 감방>​

제우스 신전



고트족의 침입으로 인해 파괴되어 84개 돌기둥 가운데 

현재는 15개만이 남아 있는 코린트 양식의 건축물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그리스 최대의 신전이다. 

제우스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한때는 규모적인 면에서 

그리스 여느 신전들보다 웅장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과거의 그 융성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많이 파괴되어 있다.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본 아테네 야경



 









 

 


<하룻밤 숙식했던 아크로폴리스 바로 아래에 위치한 아테네 디바니 호텔>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그리스의 고린토 

그리스의 고린토

펠로몬네소스 반도의 관문이며  아테네에서 8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고린토는
고대의 영화를 누렸지만  지금은 구 고린토라 불리며, 

현재의 고린토 시내에서 8km정도 더 들어간 곳에 있었다.

그러나, 옛 고린토의 번영과는 달리 지금은 조용하고 작은 도시에 불과했지만, 

평화로움이 넘쳐나고 있었다.

 

아크로고린토스(코린토의 높은 바위)

아크로고린토스(코린토의 높은 바위)라 불리는 이 곳은 해발 575m에 있고 


일명'펠로포소스의 족쇄'라고 불릴 만큼 튼튼한 성채로 되어 있다.


 '에피라' 즉 관찰, 관측소, 경계는 의미로 B.C 7~6세기 경에 성채를 쌓았으며 


현재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보아 4세기 의 축조물로 보고 있으며 


성벽은 유스티니아노스 황제 때인 슬라브 족들의 침공 이전인 


A.D 583~586년 경에 다시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채의 길이는 2,000m에 이르며 성채 안에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어 


이 곳에 종사했던 제관과 천여명의 제녀에 의해서 종교라는 명목아래 자행되었던


 음행이 유행처럼 번져 외국인들의 발걸음 까지도 잡아 당겼다고 한다.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한 때 수 천명의 무녀들이 살고 있었으며 


을 내려와 매춘업을 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꽤 높은 앞산 정상에 성을 축조하고 신전을 짓고 음행이 이루어졌다.






<사진 왼쪽 길이 항구로 통하는 길>





<아폴로신전의 남아있는 7개의 돌기둥과 아치형의 서쪽 상가유적>



 



<박물관 옆의 폐허가 된 유적>




파괴된 유적의 잔해들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다.










코린토식 기둥 상부 조각

 


 

<바오로 재판터>








 

<우물과 목욕탕, 물저장고>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대리석 조각>

​<체육 시설이 있었던 넓은 터의 유적>

고린토 박물관​

아폴론 신전의 옆에 있는 박물관에는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는데 쓰인 


항아리, 술병, 화병, 물병 등이 있고, 


로마시대의 율리아 황제 가의 7개 동상과 신격화된 율리오스 황제의 모습, 


네로의 두상, 모자이크, 치료의 신인 아프로디테 신전 터에서 발굴된 조각 파편들

(환자들이 신전에서 나음을 받고 신께 감사의 표시로 환부들을 받들어 봉납한 것들) 


이 있다.



 

<박물관 뜰에는 목잘린 대리석상들이 줄지어 서 있다.>










 

<시체의 다리뼈를 꺾어 석관에 넣었다고 한다>

 











<네로 황제의 두상>




 

<타일을 섬세하게 붙여 만든 예술품> 

 








 

 


 

<쓸모있고 아름다운 질그릇 작품들>










고린토 운하 

 

고린토 만과 에게해의 사로닉 만을 연결하는 운하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BC 7세기부터 였고, 실제로 운하 건설을 시도한 사람은 67년 로마 황제 네로였는데 

그가 죽으면서 완성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 왕 조지 1세 때인 1881년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재정적인 어려움 등의 이유로 1893년에서야 완성되었는데, 

운하는 8m의 물깊이에 6.343m 길이, 그리고 24.6m의 폭이

 지상에서 해수면까지 높이가 79m이다.

 

1988년도 이 운하 위로 지나는 철도가 놓여져 동쪽 이스트미아(Isthmia)항구와 

쪽 포세이도니아(Poseidonnia)항구를 잇고 있다.

이 운하의 건설로 펠로폰네스 반도를 빙 돌아가는 700Km의 길이 단축되었으나, 

운하의 폭이 좁은 관계로 폭 16.5m 이하 바닥 깊이 7.3m 이하의 

배들만 운행이 가능하다. 

일 년에 1.1000척의 선박이 이 운하를 이용한다고 한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터키 출국 그리스 입국 

그리스와의 협약에서 섬을 소유하지 않기로 한 

터키의 국경도시 체스메에서 출국 수속 후 

약 1시간 정도 걸리는 잔잔한 에게해를 건너

그리스의 섬인 히오스항에서 그리스 입국 수속을 했다.

 

 

 

 



간단한​ 출국심사를 하는 터키 체스메 세관
 

 

그리스로 가는 배는 태종대 관광 유람선 규모 정도이나

의자가 부족하여 불편하기 짝이 없다.​

관광 유람선을 타고 국경 바다를 넘는다.



<배에서 본 터키 체스메의 모습들>


 

 

1시간 좀 못 걸려 그리스 히오스 섬의 항구에 닿아 간단한 입국절차를 밟았다 



히오스 항의 풍경
 

 

 

<양고기인지 쇠고기인지 잘 알지 못한 점심을 먹은 식당>

 




<히오스항의 여러 모습들>




 

 

 



<여행중 처음으로 한정식으로 식사한 김씨 중국집>


 


 

​저녁 9시경에 히오스항 훼리부두에서 승선하여 4인 1실의

비좁은 객실에서 잠을 자다.

 


<이튿날 아침 이번 여행에서 모처럼 해돋이를 감상하다.






<아침 7시경에 아테네 피레우스항에 닿은 후 한식당에서 육개장 식사를 하다>



 

 


                                '14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성모님의 집 

성모님의 집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26-27)

 

그리하여 요한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성모님을 모시고 에페소로 오게 되며,

에페소 3차 종교회의록에 기록되어 있기를 

요한이 성모마리아께 산 위에 집 한채를 지어 드렸다고 하였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집의 장소는 잊혀지고  폐허가 되었다.

 

1878년 캐더린 에메리히(Catherine Emmerich)라는  독일의 수녀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고 "성모마리아의 생애"라는 책을 써 냈는데, 

이 책속에 성모마리아의 집의 위치를 기록해 놓았다.

 

이 수녀는 자신의 고향밖으로 한번도 나간 적이 없었으므로 이를 기이하게 여겨 

1891년 이즈미르에 있는 폴리갑성당의 나자렛神父가 탐사반을 조직하여 

책에 있는 곳을 조사하여 마침내 이곳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위치와 집터모양이 책속의 내용과 일치하였다.

 

100년전까지만해도 그리스정교회에서 해마다 8월15일(성모승천일)에 

이 집에서 순례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1967년에는 바오로6세가, 1979년에는 요한바오로2세께서 다녀가신후 

성지(聖地)로 인정하였으며 

그 이전인 1892년에 이즈미르의 주교인 "토모니우"가 성지(聖地)로 선언하였다.

 


<성모님의 집 올라가는 산길 입구에 서있는 성모상>





<성모 마리아의 집 입구>
 




 

 

 

 


<성모님의 집>




 

<성모님의 집 내부의 제단 - 실내 사진촬영금지로 안내책자 촬영 사진>

 

<소원의 벽>



<성모님의 집 부속 성당에서 미사 봉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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