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holic/국내 성당 및 성지

미리내 성지

Theodor 2019. 6. 11. 11:29

경기도 안성 북쪽 40리쯤 떨어져 은하수라는 뜻의

아름다운 우리말로 불리우고 있는 미리내는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묘소와 어머니 우르술라,

김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그리고 김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있는 곳이다.

성지에 들어서면 고요하면서도 편안함이 가슴에 와 닿는다.

비록 신자가 아니더라도 성지를 둘러보면 가슴이 깨끗해짐은 느낄 수 있다.

이곳이 미리내로 불리게 된 것은 천주교신자들이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 들어와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밤이면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달빛 아래 비치는 냇물과 어우러져 마치 은하수처럼 보인다 하여 미리내로 붙여졌다.

본래 미리내는 경기도 광주, 시흥, 용인, 양평, 화성, 안성 일대 등

초기 천주교 선교지역의 한 곳이다. 

김 신부가 미리내에 묻힌 지 50년 후인 1896년 비로소 본당이 설립됐을 때

이곳에는 이미 1천6백여명의 신자가 있었다.

26세에 처형당한 김대건 신부는 조정에서 장례마저 치루지 못하게 하여 처형당한 지

40일이 지난 다음에야 이민식 빈체시오가 간신히 시신을 빼내어 남의 눈을 피하며

일주일을 등에 지고 이곳 미리내로 옮겨와 안장할 수 있었다.

미리내는 1972년부터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을 시작해

1989년에 웅장한 103위 성인 기념 대성전이 완성되었는데,

성지에 오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성지 한 가운데 웅장한 기념성당이다. 

* 김대건 1822~1846(순조22 ~ 헌종12)


 세례명 안드레아 우리 나라의 최초의 신부이며 순교 성인으로, 

  충청 남도 내포에서 독실한 천주교도 부모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천주교 탄압을 피해 경기도 용인의 골배마을로 이사와서 살면서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부모님에게서 천주교의 교리를 익혔다.

1836년(헌종 2) 프랑스 신부 모방한테 영세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 최방제 등과 함께 중국의 마카오에 건너가,

파리 외방 전교회 칼레리 신부에게 신학을 비롯한 서양학문과 프랑스어. 라틴어를  배웠다.

그 후 마카오에 민란이 일어나자 1839년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6개국어를 공부하였다.

1842년(헌종 8) 프랑스 군함 제독 세실의 통역관으로 있다가

몇차례의 실패 끝에 1845년(헌종 11) 고국을 떠난 지 9년만에 돌아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포교에 힘쓰다가 페레올 신부를 데려오기 위하여

쪽배를 타고 중국 상하이에 건너가 24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 후 페레올. 다블뤼 두 신부를 모시고 충청남도 강경을 거쳐서 귀국하였다.

그는 지방선교에서 10년 만에 고향에서 어머니를 만났으나 아버지는 순교한 뒤였다.

1846년 최양업과 다른 신부의 입국을 위하여 비밀 항구를 찾다가 체포되었는데,

서울로 끌려와 40회에 걸친 문초를 받고 9월 새남터에서 순교(당시 26세)하였는데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참수하여 군문 효수할 것인데

헌종이 편법을 써서 효수하지 않고 매장하게 하였는데

매장 40일 후에 양성면 미리내에 사는 이민식 씨에 의하여

밤으로 7일에 걸쳐 운구하여 현재 미리내 묘지에 안장하였으며,

1925년 7월 5일 로마교황 비오 XI세로부터 복자위에 올림을 받았고

1984년 5월 6일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직접 거행한

시성식에서 카톨릭 성인 자리에 올랐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돌 벽돌로 건축된  구 성당

묵주의 기도 길 --규모가 어마어마히다.

 103위 성인 기념 대성전과 성모당

 

성모당 내부와 김대건 신부의 목각인형

기념성당 내부

 

김대건 신부님 묘소와 기념경당

 

 

귀가 길 문의휴게소에서 저녁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