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holic/국내 성당 및 성지

죽산순교성지

Theodor 2019. 6. 11. 00:54

2019. 06. 09 안락성당 레지오 제2411 꾸리아 단원들이

죽산성지와 미리내 성지에서

야외행사를 가져 순교 선열들의 신앙을 되새겼다.

 

죽산순교성지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 하여 "잊은 터" 로 불리게 된

순교터  죽산은 현재 행정구역상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으로

조선시대에는 몇 차례 도호부(都護府)에서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고종 32년(1895년) 지방관제개정에 의해 죽산도호부에서 죽산군으로

되었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안성군으로 편입,

현재의 죽산면으로 개정되었다. 

고려 때 오랑캐(몽고)들이 진을 친 곳이라는 이진(夷陣)터가 있으며,

이 곳이 병인박해 때 처형지로 이용됐다.

지금의 성원목장 중심에 해당하는 자리이다.

잡혀 온 사람들은 죽산관아(현재 죽삼면사무소)감옥에서

이진터로 끌고 가 처형했다고 한다.

신자들 사이에서는 이진터로 끌려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고

하여 ‘잊은 터’라고 불렸다고 한다. 

 

"신앙 증거의 땅, 죽산순교성지"

죽산에서는 1866년 병인박해부터 1871년 신미양요 때까지

이름이 알려진 스물 네 명과 수많은 무명교우들이

피를 흘리며 신앙을 증거하고 하느님께 목숨을 바쳤다.

그 순교의 땅이 오랜 동안 황무지로 버려져 있다가

1994년 강정근(마티아)신부가 죽산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성지 성역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안성 구포동성당에서 분리돼 나온 죽산성당은 

수원교구 이정운 몬시뇰에 의해 건축돼

무명순교자 성당으로 봉헌하고 죽산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을 위한 기념비를 성당 한 구석에 건립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순교자들의 순교 사실이 자꾸만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져가는 형편이라

이를 안타깝게 여긴 강정근(마티아)신부가 매달 죽산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한  이진터 앞 성원목장 도로변에서 기념미사를 

드리기 시작하였으나  당시에는 비포장도로의

먼지와 소음 속에 제대로 된 미사와 강론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소음과 먼지 속에서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제대로 묵상 할 수가 없어

강정근(마티아)신부는  이진터를 성지로 개발하기로 결심하고

하느님께 간구하며 노심초사하였으나 

시골 본당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였다.

 

이에 좌절하지 않고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신자들과

일심동체가 되어 황무지에 호박을 심어 팔기도 하고,

신자들이  생산한 포도를 서울 각 성당으로 가지고 다니며 팔아,

거기서 얻은 수익금으로 성지 개발기금을 조성하는 한편,

교구내 각 성당을 순회하며 성지 개발을 호소,

성지 개발 후원 회원을 모집하여 그 성금으로

성지 개발에 필요한 땅을 구입하여 1차적으로

성지 개발을 하게 되었고,  현재의 죽산성지로 성장 하게 되었다.

 

대로 변에 있는 죽산성지 표지석

성지 안내도와 딥구의 표지석과 예수님 대리석상

성역문 밖 휴식공간

죽산성지 정문인 성역문

성지의 야외마사 제대와 십자고상

 

장미 터널과 장미 아치 아래의 십자가의 길

 

 

무명 순교자 묘와 이름이 알려진 24위의 무덤이 양쪽에 마련돼 있다.

  124위 중에 두분의 순교자가 복자품에 오르셨다.

피에타 대리석상이 성지 양쪽에 있다.

성지 중앙 제대 뒤의 십자고상

 

외형이 한옥형태를 한 대성전

 

대성전 출입구와 성전 앞 순명의 성모상

대성전의 내부

제 1 ,2 독서를 한 레지오 단원

신부님의 복음선포와 유머러스한 강론

 

영성체 예절

 

신부님의 특별 연주 섹스폰 연주

예수승천대축일 장엄강복

잘 가꾸어진 푸른 잔디와 아른다운 장미 정원의 아치 안에 묵주를 상징하는 돌구슬이 있다.

야외 부페 점심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