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티 공소(1868년~)는 간월 공소와 대재 공소가 박해로 파괴된 후

설립된 부산 교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소다.

 

 가지산과 석남사, 사자평 등으로 지금은 번잡한 관광지에 속하지만

박해 시대에는 수목이 울창해 대낮에도 길을 잃기 쉬운 곳으로

 사람이 찾아 들기 힘든 은밀한 지역이었기에

박해시대 신자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피난처의 구실을 했던 곳이다.

 

경부 고속도로 언양 인터체인지에서 12km 남짓한 거리의 살티는

극심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이 원인이 되어

1876년 1월 24일 치명한 김영제 베드로의 묘가 있는 곳으로

초대 교회 때부터 교우촌이자 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성소의 고장이다.

 

살티’라는 말의 유래는

“당시 관헌들이 교우들을 찾아 석남사까지 왔다가

경주로 빠져 나감으로써 이곳의 교우들이 죽음을 면하고

무사히 살아남아  ‘살 수 있는 터’라고 하여

살티 혹은 살틔라 부른다.” 고 전해진다.

 

후손들에 의해 순교자들의 신앙의 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살티는

최재선 주교, 김문옥 · 이종창 · 김윤근 신부 등

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성소(聖召)의 고장으로 자라났다.

             

              현재의 공소 건물은 1982년에 부산교구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건립됐다.

 

살티 순교자 성지

병인박해가 경상도 지역을 휩쓴 1868년 간월골의 김영제 베드로는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허인백 야고보와 함께 체포돼

경주로 압송되었다.

 

 김영제를 제외한 세 사람은 울산 장대벌에서 순교하고,

김영제는 다시 서울로 이송되어 9개월 간 무수한 매를 맞는 고초 후

고종의 혼인날에 특별히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안살티에 정착했다.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 안살티에 살던

신자들은 논밭을 일굴 수 있는 평지를 찾아 현재의 공소가 있는

살티로 이주하여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다. 

 

숱한 고문으로 반죽음이 되어 돌아온 김영제는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리다 1876년 1월 24일 장하치명(杖下致命)했다.

 

현재 그의 묘소는 이곳 살티의 가족 묘소에 안장되어 있고

그의 후손들도 이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성지 전경

순교자 김영제와 여동생 김아가다 무덤

교자

 

 

십자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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