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6. 09 안락성당 레지오 제2411 꾸리아 단원들이

죽산성지와 미리내 성지에서

야외행사를 가져 순교 선열들의 신앙을 되새겼다.

 

죽산순교성지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 하여 "잊은 터" 로 불리게 된

순교터  죽산은 현재 행정구역상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으로

조선시대에는 몇 차례 도호부(都護府)에서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고종 32년(1895년) 지방관제개정에 의해 죽산도호부에서 죽산군으로

되었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안성군으로 편입,

현재의 죽산면으로 개정되었다. 

고려 때 오랑캐(몽고)들이 진을 친 곳이라는 이진(夷陣)터가 있으며,

이 곳이 병인박해 때 처형지로 이용됐다.

지금의 성원목장 중심에 해당하는 자리이다.

잡혀 온 사람들은 죽산관아(현재 죽삼면사무소)감옥에서

이진터로 끌고 가 처형했다고 한다.

신자들 사이에서는 이진터로 끌려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고

하여 ‘잊은 터’라고 불렸다고 한다. 

 

"신앙 증거의 땅, 죽산순교성지"

죽산에서는 1866년 병인박해부터 1871년 신미양요 때까지

이름이 알려진 스물 네 명과 수많은 무명교우들이

피를 흘리며 신앙을 증거하고 하느님께 목숨을 바쳤다.

그 순교의 땅이 오랜 동안 황무지로 버려져 있다가

1994년 강정근(마티아)신부가 죽산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성지 성역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안성 구포동성당에서 분리돼 나온 죽산성당은 

수원교구 이정운 몬시뇰에 의해 건축돼

무명순교자 성당으로 봉헌하고 죽산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을 위한 기념비를 성당 한 구석에 건립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순교자들의 순교 사실이 자꾸만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져가는 형편이라

이를 안타깝게 여긴 강정근(마티아)신부가 매달 죽산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한  이진터 앞 성원목장 도로변에서 기념미사를 

드리기 시작하였으나  당시에는 비포장도로의

먼지와 소음 속에 제대로 된 미사와 강론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소음과 먼지 속에서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제대로 묵상 할 수가 없어

강정근(마티아)신부는  이진터를 성지로 개발하기로 결심하고

하느님께 간구하며 노심초사하였으나 

시골 본당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였다.

 

이에 좌절하지 않고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신자들과

일심동체가 되어 황무지에 호박을 심어 팔기도 하고,

신자들이  생산한 포도를 서울 각 성당으로 가지고 다니며 팔아,

거기서 얻은 수익금으로 성지 개발기금을 조성하는 한편,

교구내 각 성당을 순회하며 성지 개발을 호소,

성지 개발 후원 회원을 모집하여 그 성금으로

성지 개발에 필요한 땅을 구입하여 1차적으로

성지 개발을 하게 되었고,  현재의 죽산성지로 성장 하게 되었다.

 

대로 변에 있는 죽산성지 표지석

성지 안내도와 딥구의 표지석과 예수님 대리석상

성역문 밖 휴식공간

죽산성지 정문인 성역문

성지의 야외마사 제대와 십자고상

 

장미 터널과 장미 아치 아래의 십자가의 길

 

 

무명 순교자 묘와 이름이 알려진 24위의 무덤이 양쪽에 마련돼 있다.

  124위 중에 두분의 순교자가 복자품에 오르셨다.

피에타 대리석상이 성지 양쪽에 있다.

성지 중앙 제대 뒤의 십자고상

 

외형이 한옥형태를 한 대성전

 

대성전 출입구와 성전 앞 순명의 성모상

대성전의 내부

제 1 ,2 독서를 한 레지오 단원

신부님의 복음선포와 유머러스한 강론

 

영성체 예절

 

신부님의 특별 연주 섹스폰 연주

예수승천대축일 장엄강복

잘 가꾸어진 푸른 잔디와 아른다운 장미 정원의 아치 안에 묵주를 상징하는 돌구슬이 있다.

야외 부페 점심식사.

 

빨마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여성요양원이 있는

양산 빨마의 집에 레지오 단원들이 방문하여

정원수 전자작업을 하다.

무아의 집 표지석과 요양원

기념성당

 

 

 

 

 

안락본당 레지오 마리애 제2411꾸리아 전 단원이

2017. 06. 10 천호, 나바위성지 순례를 다녀왔다. 


부활성당 전경


부활성당 내부와 미사집전 주임신부님


순례자를 위한 식당

성물박물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각국의 작고 아름다운 성물들


순교자 묘역

부활성당 지하의 봉안경당

천호성지 피정의 집


신부님의 나바위성당의 역사를 경청하는 순례교우들


바티칸 공의회 전(미사 집전사제가 등을 보이는)과 후의 제대가 같이 보존되어 있다.




옛 제대 상단의 예수성심상


우리나라 육지에 처음 도착한 김대건, 페레올, 디블뤼 주교와의 사지.

제대를 참관하는 교우들

6.25 전쟁 때 병원으로 쓰인 성당 오른쪽이 위치한 치유의 집


성당 양쪽의 회랑과 뒷모습에서 한옥으로 건축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  파리외방전교회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        
 
 
출처 : [가톨릭대사전]  참조

 외방전교회는  파리에1658년 7월 29일 창설된 후,

1831년 9월 한국에 처음 진출하여 한국천주교회의 초창기 발전은

물론 교회를 통하여 한국 민족과 고락을 같이 한 선교단체이다.

   한국진출 : 1825년 사제 파견을 요청하는 한국인 교우들의 편지를 접하게 된 교황은

1827년 9월 1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였고,

파리 외방전교회 역시 프랑스혁명 때문에 회원이 10여명 밖에 없었고 돈도 없어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방콕의 보좌주교이던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는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그는 1831년 9월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초대 조선대목(朝鮮代牧)으로 임명되자

즉시 입국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 3년이 지난 뒤 만주에 도착하였지만

한국 입국의 많은 어려움 때문에 1835년 10월 한국을 바라보면서 만주의 교우촌 마가자(馬架子)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836년 모방(Maubant, 羅) 신부, 1837년에 2대 조선대목인 앵베르(Imbert, 范) 주교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입국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의 본래 목적에 따라 3명의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에 보내 신학 교육을 받고 사제서품을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1845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배출되었다.

   이에 앞서 1839년 1월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시작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39년 9월에는 마침내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3명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그 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한국의 입국을 시도하

1845년 10월 3대 조선대목 페레올(Ferreol, 高) 주교, 다블뤼(Daveluy, 安) 신부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충청도 강경(江景)에 도착하였다.

 

 

1846년 병오(丙午)박해를 치른 뒤 1866년 병인(丙寅)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하여 메스트르(Maistre, 李),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푸르티에(Pourthie, 申), 페롱(Feron, 權),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볼리외(Beaulieu, 徐),

도리(Dorie, 金), 위앵(Huin, 閔) 신부 등이 계속 입국하였지만 1866년 병인년 대박해가 일어나자

모두 순교하고 살아남은 3명 선교사도 중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10년이 지난 1877년이 되어서야 다시 한국에 입국할 수가 있었다.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 전경

 

전교회 성당

 

성당 내부

 

파견 선교사들이 성모님의 보호와 은총을 비는 성모

성모당에 모셔져 있는 성모자 대리석 상

 

명동 주교자 성당 신자들이 기증한 한국순교성인현양비

 

감사의  표시로 기증한 동종

전교회 정원에 있는 성상들

파리 시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이름모를 성당들

 

기적의 메달 성당 , Chapelle Notre-Dame de la Médaille miraculeuse

 

기적의 메달은 성모 마리아가 파리에 있는 성 빈첸시오 바오로 자비 수녀원 내 소성당에 발현하여

 카타리나 라부레(Sainte Catherine Labouré) 수녀에게 직접 준 메달을 말한다.

1830년 7월 18일~19일 저녁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에게 처음 성모의 발현하셨

1830년 11월 27일 성모의 두 번째 발현 때 이 메달을 성모께서 라부레 수녀에게 보여 주면서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커다란 은총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로 인해 기적의 메달 성당은 소성당이지만 성모의 발현지로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신자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성당 내 제대 위에는 성모의 첫 번째 발현 장면이 그려져 있고

정면에는 메달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의 성모 마리아상이 있다.

우측에는 두 번째 발현을 조각한 모습이 있으며

그 밑에는 사망한 후 57년이 지나 시복을 위한 시신 발굴 당시(1933년)

전혀 부패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된  라부레 수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기적의 메달 성당에서 봉헌한 순례 감사 미사

   아담한 파이프 올갠이 설치되어 있는 2층 뒷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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