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동남아여행 --캄보디아 앙코르 왓 (Angkor Wat) 사원  

앙코르 왓 (Angkor Wat) 사원 
 

 씨엠립(Siem Reap)에서 북쪽으로 약 6㎞에 위치해 있으며

앙코르의 유적 중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장엄한 규모와 균형, 조화 그리고 섬세함에 있어서 최고로 꼽힌다.
앙코르(Angkor)는 '
도시사원’ 이라는 뜻이 된다.

앙코르 대부분의 사원은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비해 이 사원은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아마도 해가 지는 서쪽에 사후세계가 있다고 보고 왕의 사후세계를 위한 고려인 듯하다. 서쪽을 향해 있는 까닭에 석양녘에 황금 빛으로 불타오르는 앙코르 왓의 모습은

신의 세계에 근접한 예술의 장엄함을 느끼게 한다.

이 사원은 수리야바르만(Suryavarman) 2세 (1113∼1150)에 의해

12세기 전반에 약 37년에 걸쳐 건축되어 힌두교의 비슈누에게 헌정 되었다.

앙코르 왓의 구조는 힌두교의 우주관에 입각한 우주 모형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앙의 높은 탑은 우주 중심의 메루(Meru)산의 정상이며

주위의 5개의 탑은 주변의 봉우리들을 상징한다.

외벽은 세상 끝에 둘러쳐진 산을 의미하며 해자(인공호수)는 ‘우주의 바다’를 의미한다. 이 해자의 폭은 약260m, 길이는 약 5.5㎞에 달한다.

이 해자를 건너기 위해서는 나가(Naga)난간을 따라 이어지는 250m의 사암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앙코르 와트의 전경을 바라보노라면

완벽한 조화와 균형 그리고 웅장한 규모에 압도당하는 감동을 맛보게 된다.

해자에는 과거에 커다란 악어가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어린아이들의 물놀이장이 되어 있다. 입구에서 본당에 이르는 길은 약 350m로서 길을 걸으며 본당 전체의 균형미, 그리고 하늘과 어우러지는 스카이라인을 음미하노라면 아름다움에 대한 진한 쾌감을 체험하게 된다.

길 중간 양옆의 아담하고 우아한 건물도 눈여겨 볼만한데 서고로 이용되던 건물이다.

서고에서 조금 더 가면 폭 50m, 길이 65m의 연못이 있는데 말라있을 때도 많다.

본당으로 올라가는 입구 전에 있는 사자가 지키고 있는 십자모양의 단상은 ‘영광의 단상’으로 불리는데 예전에는 왕이 종교의식을 참관하거나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본당으로 들어서면 외부 복도의 벽면에 인류의 자취 중 손꼽히는

명작인 환상적인 부조가 펼쳐진다.

또 중앙 통로로 가다가 옆의 사잇길로 약 50m쯤 벗어나 사각에서

중앙의 탑을 보면 5개의 탑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감상할 수 있다


 


 앙코르 왓 출입구 사무실--이곳에서 즉석사진이 찍힌 관람권을 받는다.





폭이 250m가 넘는 해자 (침입을 막기 위한 인공수로)와 사워과 연결된 교량


서쪽 출입구 다리를 지키는 사자와 뱀 조형물--다리와 담의 난간은 대부분 뱀 조형물로 되어 있다.



해자를 건너는 사암돌다리 중간의 넓은 공간



돌다리와 출입구 건물

 --가운데 문은 군주 출입문이라 출입금지,  관광객은 양쪽 신하 출입문으로 입장함





출입구 안쪽에 서 있는 신상


건물의 돌창살과 미녀들의 부조작품





서고로 이용됐던 건물





인공 연못






아름다운 정원



앙코르 왓 사원의 전경 -- 3개의 탑과 양쪽의 부셔진 석탑






주변에 돌이라고는 없는 곳에 많은 암석을 사용하여 사원을 건립한 것을 보면

고대의 완들의 힘이 얼마나 컷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석탑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




1층 미물계에서 2층 인간계로 올라가는 계단


사원의 부분 사진들--2층 인간계에서 3층 신들의 세계로 올라가는 계단이 가파르다.



회랑과 회랑의 천정 조각 모습




역사와 왕의 일대기가 부조되어 있는 회랑의 안쪽 벽면












미물들이 사는 1층의 정원 -- 위 사진 오른쪽 담장에 부조되어 있는 미녀상들.,



사원 안쪽의 돌로 된 정원









캄보디아 씨엠립 현지식 식당의 민속예술 공연 모습

현지식을 먹으며 민속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캄보디아문화마을 간판 

인어공주 춤


공주의 춤


남녀 어부의 사랑을 주제로 한 춤



           2008 동남아여행 --타 프롬 (Ta Prohm) 사원7

                    타 프롬 (Ta Prohm) 사원

타 프롬은 ‘브라흐마의 조상’ 이라는 뜻으로 바이욘을 건설한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에게 봉헌하기 위해 지은 불교사원이다. 
이 사원은 가로 600m, 세로 1,000m로서 앙코르 사원 중 가장 큰 규모 중 하나이다.
 사원 내부 벽에 새겨진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해 보면 
이 사원에는 2,700여 명의 스님들이 거주하였고 
약 3,000여 개의 마을이 이 사원의 관하에 있었다고 한다.
 그 재산도 엄청나서 금 500㎏, 35개의 다이아몬드, 
4,000여 개의 진주 등을 가지고 있었으며 
추모행사 때에는 166,000여 개의 촛불이 쓰여 졌고 
약 8만 명의 노역자가 종사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된 상태로서 예전의 영화를 가름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폐허 자체가 가지는 아름다움은 프레아 깐(Preh Kahn)과 
더불어 가히 앙코르에서 으뜸으로 꼽을 수 있다. 
무화과, 보리수 등의 거대한 나무들이 벽과 지붕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담을 넘고 문을 감싸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엄청난 자연과 인간이 빚어낸 예술의 극치와도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일부 보존론자 들은 이 사원을 보수하는 것은 오히려 사원을 망치는 길이고 
자연과 함께 스러져가는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복원 공사 -- 완전 복구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닜다고 함









공명의 방


































              


             
 08동남아(베,캄) 반데스레이 사원 

 

반데스레이 사원 

 

 '여자의 성채'를 뜻하는 반데스레이 사원은 앙코르 왓 사원들 가운데 드물게 

붉은 사암을 사용하여 석양 때 붉은 빛 광채를 내품는다. 

중앙사당의 '테바다 상'은 발견 당시  유럽에서는 '동양의 모나리자' 로 찬사를 받았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옛 앙코르 왓 문화를 체감할 수 있다.



유네스코 지정 인류문화유산 기념비




사원 들어가는 길






사원 왼쪽 출입문



문 지붕의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







중앙 사당





화려한 자태의 3탑







아름다운 부조 조각품





출입로에서 본 사원의 전경



순례를 온 인도(?) 승려들






08동남아(베,캄) - 출국--씨엠립
출국--씨엠립 
해외여행 > 08동남아(베,캄) | 2008-09-06 (Sat) 14:29

 

08/09/01 - 09/06 (4박6일간)

 베트남 하롱베이와 하노이와

캄보디아 씨엠립 앙코르와트 여행을 가다.


09/01/  10 : 30 베트남항공 편으로  김해를 출발하다

....4시간 40분간 남지나해를 날아가 호치민에 도착



메콩강에 휘감긴 호치민시



베트남 호치민( 구 사이공)시 탄손누트국제공항에 도착하다

호치민시 탄손누트공항에서 캄보디아 행편을 갈아타고 캄보디아에 들어가서 
세계 최대의 인공호수인 바라이호수 부근의 씨엠립 국제공항에 도착하다. 


프랑스가 건설한 씨엠립국제공항은 너무 작아 비행기까지 걸어가 타고 내린다.


씨엠립 국제공항 대합실에 있는 코끼리를 탄 석가모니상


캄보디아의 상징인 머리 여럿인 뱀과


씨엠립의 투숙호텔과 문화재를 소개하는 호텔의 조경





예쁘고 생갬이 살아닜는 열대 화초





민속공연













북한 음식점-- 손님을 위한 공연을 한다.





버스에서 본 공항부근의 풍광 --사원 건물과 야자수가 있는 전통 농가

.




08,캄보디아 - 타 프롬 (Ta Prohm) 사원
타 프롬 (Ta Prohm) 사원 
해외여행 > 08동남아(베,캄) | 2008-09-08 (Mon) 13:38

                    타 프롬 (Ta Prohm) 사원

타 프롬은 ‘브라흐마의 조상’ 이라는 뜻으로 바이욘을 건설한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에게 봉헌하기 위해 지은 불교사원이다. 
이 사원은 가로 600m, 세로 1,000m로서 앙코르 사원 중 가장 큰 규모 중 하나이다.
 사원 내부 벽에 새겨진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해 보면 
이 사원에는 2,700여 명의 스님들이 거주하였고 
약 3,000여 개의 마을이 이 사원의 관하에 있었다고 한다.
 그 재산도 엄청나서 금 500㎏, 35개의 다이아몬드, 
4,000여 개의 진주 등을 가지고 있었으며 
추모행사 때에는 166,000여 개의 촛불이 쓰여 졌고 
약 8만 명의 노역자가 종사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된 상태로서 예전의 영화를 가름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폐허 자체가 가지는 아름다움은 프레아 깐(Preh Kahn)과 
더불어 가히 앙코르에서 으뜸으로 꼽을 수 있다. 
무화과, 보리수 등의 거대한 나무들이 벽과 지붕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담을 넘고 문을 감싸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엄청난 자연과 인간이 빚어낸 예술의 극치와도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일부 보존론자 들은 이 사원을 보수하는 것은 오히려 사원을 망치는 길이고 
자연과 함께 스러져가는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복원 공사 -- 완전 복구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닜다고 함









공명의 방
































문등왕 자야바르만 7세              
 08동남아(베,캄) | 2008-09-08 (Mon) 13:57

              자야바르만 7세 (1120/25경~1215/19경)

  크메르(지금의 캄보디아) 제국의 왕(1181~1215경 재위)으로 

영토를 최대로 확장시켰으며 앙코르 톰을 비롯해 

사원·도로·휴양소·병원 등의 건설 사업에 힘쓴 캄보디아의 영웅

왕의 화장터 위(문둥왕 테라스)에 있는 문등왕 자야바르만 7세 석상


생애

  자야바르만 7세는 앙코르 왕가 출생으로 

신심이 깊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인 자야라자데비 공주와 결혼했으나 

일찍 죽자 역시 신심이 깊었으며 학식이 있어

 이전에 불교사원의 수석교사로 임명된 적이 있는 그녀의 언니와 재혼했다.

  자야바르만 7세의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현재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참파 왕국 근처에서 살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아버지 다란인드라바르만 2세(1150~60 재위)가 사망했을 당시 

그는 참파에서 군사 원정중이었으며 그의 형(사촌인 듯함) 

야소바르만 2세(1160~66 재위)가 즉위하자 자야바르만 7세는 참파에 그대로 남았고

 뒤에 그는 궁정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캄보디아로 돌아왔으나 

너무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트리부바나디티아바르만(1166~77 재위)이 

야소바르만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지 못했고, 

고향에 머물면서 왕위를 계승할 기회를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약 12년 후 자야바르만 7세가 50대 후반이 되었을 때 

참파 왕국이 침입하면서 그 기회가 생겼다. 

참파의 침입으로 트리부바나디티아바르만은 죽고 앙코르는 약탈당했으며 

외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상황에서 자야바르만 7세는 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고

 5년이 채 못 되어 침략자를 내몰았으며 

캄보디아의 주도권을 장악해 1181년 61세의 노령으로 

재건된 크메르 제국의 왕위에 올랐으며 30년에 걸친 황금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이 기간에 제국은 그 영역 판도나 왕실 건축 분야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건설사업

  자야바르만 7세는 재위 동안 정복사업을 계속 벌여 참파, 

남부 라오스, 말레이 반도와 미얀마 일부를 그의 지배하에 두었고, 

점차 자신의 정력이나 조직 능력을 선대의 왕들이 해왔던 

종교적·정치적 건설 사업에 쏟아 바욘을 비롯한 많은 멋진 사원을 새로 건립했다. 

사원은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대승불교식 피라미드 사원으로서 

왕실신앙의 중심점이자 자야바르만 자신의 능묘로 지은 

대승불교식 장례사원으로 자야바르만의 부모에게 헌정되었다. 

수많은 지방 사원에는 부처의 상징과 함께 자야바르만 7세를 

묘사한 왕실 불상의 축소 모형을 두었는데, 그 원형은 바욘에 안치했다.

  그는 현재의 앙코르 톰인 앙코르 시를 재건했고 간선도로도 확대하여 

바욘과 왕국으로부터 각 지방으로 뻗어나 갔으며

이 도로들을 따라서 100개 이상의 휴양소가 지어지고 

100개 이상의 병원이 만들어졌다. 

자야바르만 7세는 왕국의 전역에 병원들을 설치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위대한 부처인 바이샤지아구루 바이두리아프라바의 가호 아래 두었다.

  그의 시대에 건설된 사원들에서 치밀하지 못한 부분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자야바르만 7세는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건설사업을 진행하는 데 

집착했던 것 같은데 어떤 학자들은 자야바르만 7세가 사원 건설에 

조급한 마음을 가졌던 이유는 그가 많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부족한 시간이나마 효율적으로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한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또다른 학자들은 대부분 불교건축물인 방대한 건설계획은 

불교, 특히 불교사원 건축에 큰 노력을 기울였던 아내 자야라자데비와 

그녀의 언니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자야바르만 7세가 나병환자로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학자들의 추측이 맞는다면 자신의 죄를 덜고 공덕을 쌓음으로써 

두려움을 이겨내겠다는 마음이 그의 신심과 종교적 열정에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의 진짜 동기가 무엇이었든지 자야바르만 7세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후손에게 물려줄 유산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크메르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도 자야바르만 7세가 

이룩한 정도의 업적을 남긴 왕은 거의 없다.


현대의 명성

  앙코르 왕국의 역사에서 자야바르만 7세가 그토록 중요한 인물이었는데도 

후대 캄보디아 역사책에는 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근대에 그의 치세에 해당하는 시기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가 흥미를 끌면서 

자야바르만 7세는 모범적인 민족영웅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캄보디아 국가 영토를 가장 넓게 확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영향으로 복지국가를 건설하여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욕구를 충족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야바르만 7세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는 보다 공정하다. 
학자들은 자야바르만 7세가 성취한 거대한 업적을 인정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왕조의 인적·물적 자원을 과도하게 소모했기 때문에,
 이후에 크메르 제국이 창조성을 상실하고 마침내 몰락하게 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앙코르 톰 사원


문둥왕 테라스에서 본 코끼리 테라스와 군대를 사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넓은 장소


코끼리 테라스 The Terrace of Elephants
  왕궁의 정문인 동쪽 입구에 약 350m길이로 이어지는 단상으로 
왕이 공공행사나 군인들의 사열을 관장하던 곳으로 동쪽 광장을 향하고 있는
 단상은 3개인데 양 옆은 코끼리들이 부조되어 있고 
중앙쪽의 단상은 가루다가 받치고 있다. 
중앙의 것은 왕이, 양옆의 것은 신하들이 사용하던 것 같다. 
  단상 위에는 나무로 된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이 곳에 올라 서면 아래 중앙광장에서 장대한 병사들의 분열과 
코끼리 퍼레이드 등이 금방이라도 펼쳐질 것 같고 
세계 최고의 권력을 가진 왕의 위용을 가늠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코끼리 테라스 아래


코끼리 테라스




코끼리 테라스의 아름다운 부조




군대 사열대로 추정되는 단과 아래 넓은 공터

  

광장 앞쪽 끝에는 12개의 탑(12 Prasate Sour Prat)이 열병하듯이 서 있어

위용을 더하고 있는데 파수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들 위에는 크레앙(The Kleangs)이라는 건물들이 있는데 이는 ‘창고’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건물의 용도는 외국에서 온 사실들을 접대하는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캄보디아 바라이 호수

 

 

경상남북도 넓이와 맞먹는 세계 최대의 인공호수인 '바라이 호수'에서는

연간 어획량 약 160만t으로 캄보디아인들의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라고 한다.



바라이 호수의 관광 유람선



호수 입구의 현대적인 수상가옥




관광 유람선





호수 하나군데 있는 수상ㄹ마을에 정박한 관광선




가장 낡은 수상가옥을 겸한 고기잡이 배





전통적인 고깃배 형태의 수상가옥




전통적인 고깃배들의 어로 모습







유람선 선착장과 수상가옥



수상 마을에 물건을 파는 배와 판매시설들



끝을 볼 수 없는 넓은 인공호수 




한국학교를 짓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수상 휴식처

--전망대에서 호수 전경을 조망한다.







광활한 늡지와 지천인 부레옥잠













수상 개신교회











톤레샵 호수


       6개월             6개월 간의 건기를 대비한 식수 저장을 목적으로 만든

                          톤레샵 호수의 모습

              





 왓트마이 사원

폴 포트 정권의 만행을 기억하기 위해 새로 만든 

작은 킬링필드라  불리는 왓트마이 사원











납골당으로 쓰이는 사원 앞 마당의 탑들


 

              

해골 보관 건물의 해골들







자동차에서 찍은 관공서로 추정되는 캄보디아 전통양식의 건물

 


하노이 (Hanoi)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로 6세기경부터 홍 강 삼각주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여

이조(李朝)·진조(陳朝)·여조(黎朝) 등 베트남 역대 왕조는 이 곳에 수도를 두었고

프랑스 식민지 통치 시대에는 (1883년~ 1945년)  이 곳에 통킹 지방의 정청(政廳)을 두어 행정의 중심으로 삼았다.

1945년부터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고, 1954년에서 1976년까지 북베트남의 수도였고,

1976년 통일 후에 베트남의 수도가 되었다.

 

수백 년 된 기념물과 궁전의 대다수가 침략과 내란으로 파괴되었지만, 사적지와 명승지가 몇 군데 남아 있다.

명승지로는 호안키엠 호('되찾은 검의 호수'라는 뜻)가 있고,

사적지로는 BC 3세기에 지은 코로아 성채, 공자의 유교 서원(1070), 모트코트('한 개의 기둥'이라는 뜻) 탑(1049),

층 여사제들의 사원(1142) 등이 있다. 하노이대학교·혁명박물관·군사박물관·국립박물관 등이 있다.

 

2007년 기준으로 인구는 340만명이었지만 2008년  하떠이 성(Ha Tay), 빈푹 성(Vinh Phuc) 등 주변의

여러 지역이 하노이의 메트로폴리탄과 통합이 결정됨으로써

하노이의 면적은 기존에 비해 3배 가량 확장된 334,470ha에 이르며,

29개의 세부행정 구역으로 분할되면서 인구도 630만명으로 늘어났다.

 

베트남의 전통가옥--한 가구가 좁은 2~4층 건물을 여러가구가 연이어 짓는다.

베트남의 농촌풍경

모조품 판매장 --주로 한국관광객이 주고객

하노이 외곽의 풍경

하노이 중심가에 있는 호수공원

베트남 공산당 청사 정문

 

 

 

 

 

호찌민 묘소(Ho Chi Minh’s Mausoleum, Lang Chu Tich Ho Chi Minh)

베트남 민족주의의 영웅인 호찌민(1890~1969)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건물 자체는 크지 않지만 넓은 바딘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어 위엄 있어 보인다.

3년(1973~75년)간의 공사 끝에 완성한 콘크리트 건물로,

언뜻 보면 차가운 회색빛과 고딕 형태의 외관으로 시선을 끌지 못할지도 모른다.

21.6m 높이의 묘소는 3개 층으로 나눠지는데, 하단부는 공산당원들이 회의를 개최하는 장소이다.

중간층은 호찌민이 잠들어 있는 곳이며, 상단부에는 ‘주석 호찌민’이라는 짙은 보라색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묘지 양옆으로 ‘호찌민은 우리 마음에 살아 있다’, ‘사회주의여 영원하라!’라는 문구가 베트남어로 적혀 있다.

외부에서의 사진 촬영은 허가되나 내부에서는 전면 금지된다.

모든 휴대품을 입구에 두고 입장해야 하며 민소매 옷, 짧은 치마, 반바지, 슬리퍼 차림으로는 입장이 불가하다.

     못꼿 사원 연꽃 모양을 본 떠 지어진 사찰

호치민 전쟁기념관

 

 

외양이 독특한 현대식 호텔

관광 3륜 자전거와 짐 나르는 여인

결혼식 풍경

오토바이와 차량이 뒤범벅된 무질서한 거리풍경들

 

귀국

 

 

하롱 베이(Halong Bay)

 

하롱 만(베트남어: Vịnh Hạ Long泳下龍)은 베트남 북부 꽝닌 성 통킹만 북서부에 있는 만의 명칭으로,

해안선이 120km에 이르며, 면적은 1,553 km²에 이르고, 1969개의 도서로 구성되어 있는 

 유네스코1994년에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한 베트남이 자랑하는 관광명소이다.

 

바다 위에 수천 개의 섬이 뿌려져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하롱베이는 

전설에 의하면  용이 내려와 산속에 살던 용이 바다로 내려올 때의 꼬리질로 계곡과 동굴들이 생겨나

현재와 같이 3천여 개의 섬 모양을 갖췄다고 하며,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중국이 베트남에 침공해 왔을 때 용 가족이 침공해온 적을 물리치고

입으로 토한 보석이 할롱 만의 섬들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중국의 계림과 견줄 수 있을 만큼 경치가 아름답고 화려하며 동굴이 있는 섬들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항 두 고(Hang Du Go) 동굴로 프랑스인들은 이 동굴을 대리석 동굴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크고 웅장한데 무려 90개의 계단을 올라야 입구에 도착할 수 있다.

 

마치 명작 조각품을 감상하는 듯한 섬들의 경관은 태양의 위치에 따라서 빛이 변하고

비나 안개에 의해 또다른 정취가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현재는 무인도이지만 약 7,000년 전의 신석기 시대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또 수세기 전까지는 해적의 은신처로서 이용되었고

몽골군 침공 시에는 군사적으로 이용되었다.

 

 

하롱 베이 지도

하롱베이 지도

 

하롱시 시가지

 

할롱(베트남어: Hạ Long下龍 하룡)은 베트남 북부에 위치한 꽝닌 성의 성도로,

하노이(베트남의 수도)에서 북동쪽으로 약 16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인구는 약 20만명이며 인근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할롱 만이 있다.

 

 

 

 

 

 

 

 

 

 

 

 

일본이 건설해 줬다는 사장교

 

 

 

 

 

 

 

 

 

 

 

 

 

 

 

 

천궁동굴
하롱베이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석회동굴인 천궁(天宮) 동굴은

4개의 종유석 기둥이 '하늘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데,
끝없이 흘러온 세월은 130m의 웅장한 동굴에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자연 조각품을 만들고 있다.

짙고 깊은 동굴의 어둠을 깨고 외부에서 간간히 들어오는 태양 빛줄기와

관광객을 위해 꾸며 놓은 분수와 색색의 조명이 신비스러운 동굴을 환상속으로 빠트린다.

하롱베이 유람선 선착장 입구

 

 

 선착장에서 관광객을 태울 유람선들이 대기하고 있다.

 

 

 

 

 

 

 

 

 

 

 

 

 

천궁동굴 앞 풍경들

 

 

 

 

 

 

하롱베이 중간 부근 절경인 곳에 위치한 수상 음식점 마을

 

 

해산물을 파는 장사집의 물고기 가두리

관광객들에게 열대과일을 파는 행상배

 

 

 

 

 

 

키스바위는 각도에 따라 정도가 다르다

 

 

 

 

 

 

 

 

 

 

 

 

티톱섬

 하롱만의 에메랄드 바다위에 자리잡은 3,000 여개의 섬들 중 하나로 구 소련의 우주비행사 티톱의 이름을 따서 불려진 섬이다. 
 ‘티톱’은 베트남의 국부 격인 호치민(胡志明, Ho Chi Min)이 소련에 있을 때 도움을 많이 준 사람으로 티톱은 호치민과 절친 사이였다고 한다.

호치민이 베트남 대통령이 된 후, 티톱을 초청하여 호치민과 같이 이 섬에 오게 된 티톱은

이 섬 위에서 하롱베이를 내려다 보다가 너무나 환상적인 풍경에 취해서 호치민에게 이 섬을 달라고 하였으나,

호치민은 베트남이 공산 국가이기 때문에 토지의 개인소유는 안되고,

선택한 섬을 티톱이 가지고 갈 수는 없으니 섬의 이름에 그의 이름으로 붙여 주었다고 한다.

그 후로부터 이 섬의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딴 "티톱섬(TiTop Island)"으로 불리게 되었다.

본래 모래가 없었으나 타이완에서 수입해와 백사장을 만들었다고 함

티톱섬 정상 8각 정자에서 바라본 주위 풍광

사람의 손으로 직접파서 만든 인공호수  서바라이 호수


 서바라이 호수는 11세기 건축물로 수리야바르만 1세때 축조 되었다. 

규모가 2.2km * 8km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호수로 앙코르 유적지 최대의 인공 호수.

서바라이호 외에도 동쪽에는 동바라이호가 있었으나
토사 유입으로 현재는 물이 말라 마을과 도로가 나 있다.
거대한 동.서바라이의 기준은 앙코르 톰이며
당시 크메르제국의 수도와 인근 지역의 
농업용수의 확보가 축조의 기본 목적이며
건기때에도 농업용수의 확보로 농작물 생산을 용이하게 하였으며 
강력한 왕권의 표출 이기도 하다.
서바라이 호수의 평균 깊이는 7m,저수량은 40만톤 이다.
현재 서바라이는 현지인들의 휴양지와 외국인 관광코스로 
현지 휴양문화와 다양한 음식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톤레삽 호수

   씨엠립 남쪽 약 15 정도 위치에 마치 바다라고 착각할 만큼 넓은 황토 빛의 호수가 눈 앞에 펼쳐지는데 이곳이 수상족들이 주로 어업을 하면서 생활터전을 삼아 살고 있다.

톤레삽 호수는 건기에는 2,600평방km(제주도의 약 2배)이나 우기에는 약130,000평방km(남한면적의 약1.3배)의 거대호수로 변해 메콩강의 범람을 막아주는 역활을 한다. 

 호수 주변과 안에는 소수의 수상족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수상학교, 수상상가,수상가옥 등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힘들것 같지만 수상족들의 실제 생활 속에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들여다 보며  다시 한번 우리들에게 삶의 행복이란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곳이다. 

 

 

 

 

 

 

 

 

 

 

 

 

 

 

 

 

 

어선들의 종류도 다양하다.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하는 무료학교와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카페

 

 

 

 

 

행상 선박

 

광활한 호수에서는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단백질 70%정도를 공급할만큼 어업이 활발하다. 

 

유람선과 관광객

 

 

 

늪지와 부레옥잠이 무성한 곳도 있다.

 

 

교회도 있다.

 

 

한국음식점과 민속품 파는 가게들

 

 

왓 트마이(Wat Themei)사원 (킬링필드)

 

'죽음의 들판'을 뜻하는 킬링필드는 크게 두가지 의미가 있는데, 

좁은 의미의 '킬링필드'는 1975년 4월 17일 집권한 폴 포트의 크메르루즈 정권이

캄보디아를 지배한 3년 8개월 10일 동안 학살, 기아 등으로 캄보디아인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이에 더해 1969~1973년 미군이 베트남군의 보급로를 끊는다며

캄보디아 북부에 폭탄을 대량 투하해 60~80만 명이 사망한 사건을 '1차 킬링필드'로 포함시키기도 한다.

 

또 다른 의미의 킬링필드는 크메르루즈 정권이 저지른 학살로 죽은 시체들을

한꺼번에 묻은 집단 매장지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약 1만 7000명의 시신을 매장한 수도 프놈펜 인근의 쯔응아익(Cheung Ek)을 비롯해

캄보디아 전국에서 2만 여개의 집단 매장지가 발견됐다.

 

캄보디아어로 '새로운 사원' 이라는 뜻의 왓 트마이(Wat Themei)는 씨엠립 시내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불교 사원인데 입구 왼쪽에는 불교를 모시는 대웅전이 있다.

 

이 사원이 여행객들 사이에 유명해진 이유는 사원 내부 한 켠에 세워져 있는 유리탑때문이다.

이 유리탑 안에는 크메르 루즈 집권시기 대학살 당시 씨엠립과 유적지 인근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해골들이 안치되어 있고 유리탑 근처에는 희생된 실제 사람들의 사진과 고문 방법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여행객들은 왓 트마이를 씨엠립의 '작은 킬링필드'라 부르기도 한다.



영화 '킬링필드'를 통해 전세계에 알려진 크메르 루즈 정권하의 대학살은 인간의 잔인함과 전쟁의 참혹함을

그대로 보여줬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때의 악몽을 기억하고 있다.

왓 트마이사원 대웅전과 대웅전 불상

 

 

 

 

학살로 백골이 된 두개골과 뼈를 모아 안치해 둔 탑

 

 

 

킬링필드 자료 전시관(?)

 

 

부자들의 무덤 탑

 

 

 

 

관공서 건물인 듯 (차창사진)

 
         타프롬 사원     
   (TaProhm Temple) 

 9~15세기 크메르 제국의 수도였던 앙코르의 유적지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수리아바르만 2세가 12세기에 지은 앙코르와트와 


자야바르만 7세가 1200년경에 지은 앙코르톰이다.


자야바르만 7세가 건립한  앙코르톰 동쪽에 있는 타프롬 사원은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이 사원은 거목들이 사원을 통째로 감싸 파괴하고 있는데 이 현상이 


폐비의 비운을 맞았던 자야바르만 7세의 어머니가 내린 저주 때문이라 믿고 있다고 한다.

 

 

 

 

 

 

공명의 방

 

 

 

 

 

 

 

 

 

 

앙코르 톰 동쪽 정문과 해자 위의 교량

 

 

 

 

 

코끼리 테라스(Terrace of the Elephants)

 

앙코르톰에는 2개의 테라스가 있는데 코끼리 테라스와 함께

그 중 하나로 크메르 신화인 '레퍼왕(문둥병)'의 주인공 조각상을 모신 것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전설에 의하면 어떤 왕이 밀림에서 뱀과 싸우다가 피가 튀어 문둥병에 걸렸다고 한다.

테라스의 내부벽은 1990년대 후반 프랑스 고고학자에 의해서 발견이 되었으며

나가(Nagas), 악마(Demons), 각종 신화에 대한 것들이 새겨져 있다.

 

코끼리 테라스(Terrace of the Elephants)는 불교 사원으로 앙코르 제국의 왕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대를 맞이하던 곳이다.

피미아나카스(Phimeanakas) 궁전에 이어져 있으며 바푸온 사원 입구에서 레퍼왕 테라스에 이르기 전까지

350m의 길이로 길게 늘어선 1.5m 높이의 벽면에 코끼리 모양의 부조가 연달아 새겨져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계단의 한쪽에는 머리가 세 개인 코끼리신 에라완이 긴 코로 연꽃을 들어올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문둥왕 테라스에 모셔진 자야바르만 7세 '레퍼왕(문둥병)'의 주인공 조각상

 

코끼리 테라스 맞은 편에 있는 용도가 불확실한 8개의 건축물

 

 

 

코끼리 테라스 뒤편의 구왕궁으로 가는 출입문

왕궁 안쪽에 뱀의 전설이 있는 피메아나카스가 있다.

 

 

 

 

 

 

 

뱀의 전설이 있는 피메아나카스

  밤이 되면 왕은 이곳 꼭대기로 향하는데 뱀이 밤마다 찾아와 왕과 밤을 보내고,

뱀이 찾아오지 않는 밤이면 왕궁이 기근과 공포에 휩쌓이고 결국 뱀이 찾아오지 않으면

왕의 죽음이 다가왔다는 암시라고 믿었다고 한다.

 

 

 

 

 

 

 

 

바이욘(Bayon)사원

바이욘(Bayon)사원은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군 중의 하나로 앙코르 톰의 중앙 부근에 자리잡고 있는

힌두교, 불교 혼합의 사원유적이며  바는 '아름답다'는 의미이고, 욘은 '탑'을 의미한다.

바이욘의 특징 중의 하나는 중앙 사당을 시작으로, 탑의 4면에  인면상(바이욘의 사방상)조각되고 있다.

 

면상은
관세음보살의 형상을 모방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나  전사를 나타내었다는 설,

장식된 갑옷을 입고 있어 자야바르만 7세를 신격화하여 우상화으로 표현하였다는 설도 있다.

 

다른 앙코르 유적군에는 보기 드문 아치 구조를 많이 이용한 건축 구조물이다.

건축 전체는 대체로 삼층의 구조로 되어 있고, 높이는 43m에 이른다.

중앙의 사당을 중심으로, 1층에는 이중의 긴 복도가 배치된 구조로 되어 있다.

50개에 가까운 탑이 있고, 117개의 인명상이 남아 있는데,

인명상의 높이는 1.7~2.2m 정도로 개별적으로는 불규칙하다.

 

 

 

 

 

 

 

 

 

 

 

 

 

 

 

 

앙코르 와트(Angkor Wat, Angkor Vat)

 
 

앙코르와트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에 위치한 사원으로, 12세기 초에 수르야바르만 2세에 의해


크메르 제국의 도성으로서 창건되었고, 앙코르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문화재이다.


축조된 이래 모든 종교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맡은 사원으로 처음에는 힌두교 사원으로


힌두교의 3대 신 중 하나인 비슈누 신에게 봉헌되었다가 나중에는 불교 사원으로도 쓰였다.


 

앙코르 와트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종교 건축물로서,


 옛 크메르 제국의 수준 높은 건축 기술이 가장 잘 표현된 유적이며  


캄보디아의  국기에도 그려져 있는데,


앙코르와트를 보러 오는 것이 관광객들이 캄보디아에 오는 제1 목적이기도 하다.

 

이 사원은 12세기 크메르 제국의 황제 수르야바르만 2세에 의해 약 30년에 걸쳐 축조되었다.


사원의 정문이 서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것은 해가 지는 서쪽에 사후 세계가 있다는


힌두교 교리에 의한 것으로 왕의 사후세계를 위한 사원임을 짐작케 한다.

 

 길이 3.6km의 직사각형 해자에 둘러싸여 있는 


이 사원의 구조는 크메르 사원 건축 양식에 따라 축조되었다.


중앙의 높은 탑은 우주 중심인 메루(Meru)산, 


수미산이며 주위에 있는 4개의 탑은 주변의 봉우리들을 상징한다.


외벽은 세상 끝에 둘러쳐진 산을 의미하며 해자는 바다를 의미한다.


이 해자를 건너기 위해서는 다섯 머리를 가진 뱀을 뜻하는 


나가(Naga)난간을 따라 250m의 사암다리를 건너야 한다.

 

앙코르(Angkor)는 도읍이라는 의미의 노코르(Nokor)의 방언이고, 


와트(Wat)는 크메르어로 사원이라는 뜻이니


앙코르와트는 '사원의 도읍'이라는 뜻이고, 이 이름은 16세기 이후부터 사용되었다.

 

앙코르와트 매표소 및 출입문

 

폭이 200m가 넘는 해자

 

다섯머리의 뱀 난간이 있는 사암 다리

 

서쪽에 나 있는 출입문은 계급에 따라 구별이 있다.

 

 

 

 

 

 

 

 

 

 

 

 

 

 

 

 

 

 

왕의 일대기가 부조되어 있는회랑의 안쪽벽

 

 

 

 

 

 

 

 

 

 

 

 

 

 

 

 

 

 

 

 

 

 

 

 

 

 

 

 

동쪽 출입구에서 본 앙코르와트

 

 

앙코르톰

 9~15세기 크메르 제국의 수도였던 앙코르톰은 시엠립 북쪽 6㎞ 지점에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기념물은 수리아바르만 2세(1113~50경 재위)가 12세기에 지은 앙코르와트와

 자야바르만 7세가 1200년경에 지은 앙코르톰이다.

 

앙코르 시는 왕가의 중심지로서, 크메르 왕조는 이곳에서 동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크고 번성하고 발달한 왕국이었다.

890년경 야소바르만 1세가 수도를 앙코르로 옮긴 때부터 13세기초까지앙코르의 왕들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끝부분에서 북쪽으로 윈난[雲南]까지, 또 베트남에서 서쪽으로 벵골 만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통치기간에 지배자들은 자신들과 수도를 찬양하기 위한 일련의 거대한 건축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막대한 노동력과 부를 이용했다.

자야바르만 7세(1181~1215경 재위) 이후 왕국의 권력과 활력은 점차 쇠퇴하여 1431년 타이 군대에게 앙코르를 점령당하여 약탈당한 다음 마침내 버려졌다.

앙코르에서 위대한 건설과 축조는 300년이 넘게 계속되었는데 이 동안 건축과 예술양식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종교의식은 시바 신과 비슈누 신을 섬기는 힌두교에서 점차 불교의 관세음보살신앙으로 퍼져나갔다.

 

 

 

 

 

 

 

 

시엠레아프(크메르어 영어: Siem Reap City, 씨엠립.) 

 

캄보디아 시엠레아프 주의 주도로 씨엠립은 17세기 타이아유타야 왕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과 관련이 있다.

앙코르 와트, 바이욘 등이 있는 앙코르 유적군 관광의 거점이 되는 도시이며 남쪽에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호수인 톤레삽 호가 있다.

 

착륙전에 본 시엠립 시가지와 편의 시설이 없고 규모는 작으나 캄보디아의 특징이 잘 나타난 국제공항

 

공항 대합실의 코끼리를 탄 부처님상 

 

호텔 정면의 문둥이왕 상

 

 

 

 

호텔의 여러 모습들

 

 

호텔방에서 바라본 시엠립시의 특색있는 지붕

 

 

 

북한음식점과 종업원들의 공연모습

 

관공서이거나 박물관(?) 건물과 야자수가  많은 농가의 모습

 

 

 

 

반데스레이  Banteay Srei사원

 

시엠립에서 34km 떨어진 반데스레이 사원은 라 젠드라바르만 2세 (944 ~ 968년)  시기인  10세기 중반(967년) 

 힌두교의 시바신과 비쉬누신에게 바친 사원으로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반데스레이 사원은

규모는 작지만 '크메르 예술의 극치 , 또는 보석'이라 평가 받는다.

 

부조들이 정과 망치가 아닌 섬세한 여성들이 바늘로 정교하게 조각하였을 것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

반데스레이 사원은 '여인의 성채'라는 의미로 왕이 만든 사원이 아닌 왕의 신하이자 왕자의 스승으로 총애를 받던

 바라문 승려 '아즈나바라하'가 건축한 이 사원이다.

 

프랑스의 소설가이며 문화성 장관을 지낸 앙드레 말로가 1923년  어느 날 이 사원에 도착하여

여신상 4점을 도굴하여 밀반출 하려다  적발되어 실형을 선고 받고 이후 '왕도의 길'이란 소설을 발표하였다.

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 앙코르의 여신상과 유물의 도굴, 밀반출과 관련된 것이 알려진 후에 아직까지도

앙드레 말로가 도굴하려던 여신상을 보기 위해 유럽인들이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앙드레 말로가 도굴하려던 여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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