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사크레쾨르(예수 성심) 성당

평지인 파리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생 드니(Saint Denis) 성인의 순교지인 몽마르트 언덕에

1870년에 일어난 보불 전쟁 예수 성심에게 믿음의 충실한 표현을  위해 바칠 성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Sainte-Sophie)을 본뜬 로마 비잔틴 양식의 사크레쾨르 성당이 1914년에 완공되었다.

 

외관은 오래되고 빗물과 접촉할수록 하얗게 되는 특성이 있는 석회암으로 만들어져 순백색을 보이며, 

 정면 중앙에 그리스도의 동상이 있고 좌우에는 잔 다르크와 생루이의 청동 기마동상이 있으며,

성당의 입구 중간의 청동문에는 최후의 만찬을 비롯한 그리스도의 생애를 담은 장면들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스 십자가 모양을 한 성당 내부는 비잔틴 양식에 따라 바닥도 모자이크 장식으로 되어 있고,

성당 제대 뒤에는 넓이 475m2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리스도의 대형 모자이크가 있다.

 

 

 성당 뒷편의 높이 83m 종탑 안에는 무게 18.835t, 직경이 3m나 되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종이 있다.

 

몽마르트르 지도

 

거리의 화가와 길거리 음식으로 유명한 몽마르트 언덕

문학작품과 음악, 미술,  연극의 소재와 무대가 되고있는

사크레쾨르 성당 옆의 몽마르트 언덕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사크레쾨르(예수 성심) 성당

파리 시가지를 내려다 보는 몽마르트 언덕에 자리잡은 성당은

은백색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프랑스 국민들과 각국의 관광객 모두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큰길에서 약 240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앞 마당이 나오는

성당 중앙 높은 곳에는 예수의 석상이

아래편 좌우에는 잔 다르크와 생루이의 청동 기마동상이 있어

프랑스 국민들의 신심과 애국심을 고취시킨다.

 

 

성당 마당 오른쪽과 왼쪽에서 본 성당 모습도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성당 옆면의 섬세한 모습과

성당 뒷편의 종탑에는

프랑스 최대의 종이 있다.

 

성당의 뒷면

성당 뒷편에 있는 부속 건물

 

사크레쾨르 성당 옆에 있는 또 다른 성당.

베드로 사도의 동상과

어느 교황이거나 주교님의 석상 

 

화려하면서도 복잡한 스테인드 글래스와

보석같은 성물이 아름답다.

 

 

몽마르트 언덕 아래 위치한 미술관

미술관 노천에 있는

프랑스의 유명한 샹송가수인 달리다의 상반신 상과

 

  

몽마르트르의 도르상 거리 75번지 2호에 뒤띠욀이라는 이름의

벽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아주 특이한 재능을뛰어난 사람 조각 작품 

 

석고상일까?

진짜 사람일까요?

 

성당 앞 마당과 계단에 쉬면서 피로를 풀고 있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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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외방전교회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        
 
 
출처 : [가톨릭대사전]  참조

 외방전교회는  파리에1658년 7월 29일 창설된 후,

1831년 9월 한국에 처음 진출하여 한국천주교회의 초창기 발전은

물론 교회를 통하여 한국 민족과 고락을 같이 한 선교단체이다.

   한국진출 : 1825년 사제 파견을 요청하는 한국인 교우들의 편지를 접하게 된 교황은

1827년 9월 1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였고,

파리 외방전교회 역시 프랑스혁명 때문에 회원이 10여명 밖에 없었고 돈도 없어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방콕의 보좌주교이던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는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그는 1831년 9월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초대 조선대목(朝鮮代牧)으로 임명되자

즉시 입국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 3년이 지난 뒤 만주에 도착하였지만

한국 입국의 많은 어려움 때문에 1835년 10월 한국을 바라보면서 만주의 교우촌 마가자(馬架子)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836년 모방(Maubant, 羅) 신부, 1837년에 2대 조선대목인 앵베르(Imbert, 范) 주교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입국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의 본래 목적에 따라 3명의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에 보내 신학 교육을 받고 사제서품을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1845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배출되었다.

   이에 앞서 1839년 1월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시작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39년 9월에는 마침내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3명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그 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한국의 입국을 시도하

1845년 10월 3대 조선대목 페레올(Ferreol, 高) 주교, 다블뤼(Daveluy, 安) 신부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충청도 강경(江景)에 도착하였다.

 

 

1846년 병오(丙午)박해를 치른 뒤 1866년 병인(丙寅)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하여 메스트르(Maistre, 李),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푸르티에(Pourthie, 申), 페롱(Feron, 權),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볼리외(Beaulieu, 徐),

도리(Dorie, 金), 위앵(Huin, 閔) 신부 등이 계속 입국하였지만 1866년 병인년 대박해가 일어나자

모두 순교하고 살아남은 3명 선교사도 중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10년이 지난 1877년이 되어서야 다시 한국에 입국할 수가 있었다.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 전경

 

전교회 성당

 

성당 내부

 

파견 선교사들이 성모님의 보호와 은총을 비는 성모

성모당에 모셔져 있는 성모자 대리석 상

 

명동 주교자 성당 신자들이 기증한 한국순교성인현양비

 

감사의  표시로 기증한 동종

전교회 정원에 있는 성상들

파리 시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이름모를 성당들

 

기적의 메달 성당 , Chapelle Notre-Dame de la Médaille miraculeuse

 

기적의 메달은 성모 마리아가 파리에 있는 성 빈첸시오 바오로 자비 수녀원 내 소성당에 발현하여

 카타리나 라부레(Sainte Catherine Labouré) 수녀에게 직접 준 메달을 말한다.

1830년 7월 18일~19일 저녁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에게 처음 성모의 발현하셨

1830년 11월 27일 성모의 두 번째 발현 때 이 메달을 성모께서 라부레 수녀에게 보여 주면서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커다란 은총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로 인해 기적의 메달 성당은 소성당이지만 성모의 발현지로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신자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성당 내 제대 위에는 성모의 첫 번째 발현 장면이 그려져 있고

정면에는 메달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의 성모 마리아상이 있다.

우측에는 두 번째 발현을 조각한 모습이 있으며

그 밑에는 사망한 후 57년이 지나 시복을 위한 시신 발굴 당시(1933년)

전혀 부패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된  라부레 수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기적의 메달 성당에서 봉헌한 순례 감사 미사

   아담한 파이프 올갠이 설치되어 있는 2층 뒷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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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파티마 성삼위일체 대성당

드넓은 파티마광장 서쪽 끝자락에 있는 삼위일체 성당 (Basilica da Santissima Trindade)은 

2007년 10월에 준공한 수용인원 8,500명 세계에서 4번째 큰 성당이다.

 성당 입구에는 독일 출신의 포르투갈 거주민이 기부한 베를린 장벽 조각,

공산주 의 몰락을 도운 신에게 쳐진 공물이 있다. 

수십가지 언어 로 성서의 구분을 적어 넣은창문,

각각의 사도에게 바쳐진 성서 인용구가 적힌 12개 청동문이 있다.

내부에는 슬로베니아 예술가 마크로 이반 루프니크의 모자 이크 작품,

아일랜드의 예술가 캐서린 그린의 예수그리스도를 묘사한 제단 뒤 장 식이 있다고 한다.

 

성삼위일체 대성당 외관은 높이 20m의 콘크리트로 된 창고같은 느낌이다.

 

 

성삼위일체 대성당 오른쪽 광장에서 대성당을 바라보고 있는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의 동상

 

성삼위일체 대성당 입구에서 보이는 광장 너머의 대성당

 

세계 각국의 언어로 성경 구절이 기록되어 있는 벽면 -- 중간 쯤에 한글도 보인다.

제대의 검은 예수상

제대 아래에 바티칸에서 기증한 베드로 사도의 뼈조각이 봉헌되어 있다.

 

광장 서남쪽에 서 있는 현대적 감각의 십자고 상

 

공산주의의 몰락을 상징하는 무너진 베를린 장벽 조각

 

미카엘 대천사와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세 아이들을 상징하는 현대 감각의 조각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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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 대성당 Notre-Dame de Paris

파리 센 강의 시테 섬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은 규모와 역사로 유명하며, 고고학과 건축학적 관심의 대상이다.

 파리 주교 모리스 드 쉴리가 이전에 있던 2개의 바실리카식 성당을 합쳐 하나의 큰 건물을 지을 계획을 세웠고,

 1163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머릿돌을 놓고 1189년 대제단이 봉헌되었다.

서쪽 앞면의 성가대석과 네이브[身廊]는 1240년 완공되었고

그뒤 100여 년에 걸쳐 포치(porch 돌출 지붕 건물의 출입구),  성전과,

그밖의 여러 장식물들을 지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수세기를 지나면서 흠집이 생기고 약해졌으며 18세기 프랑스 혁명 때 크게 파손되어,

19세기에 서쪽 정면 '그랜드 갤러리'의 28개 조상과 3개 출입문 측벽에 서 있는

조상 등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다.

트랜셉트[翼廊]와 네이브 사이에 높이 솟은 첨탑은 19세기에 복원된 것이다.

전체 길이 130m, 폭 48m, 천장 높이 35m, 탑 높이 69m의 대건축물로

4각형 쌍탑  위에 뾰족탑을 덧붙이기로 되어 있었으나 아직 그대로이다. 

지름 9m의 '장미의 창'은 스테인드 글래스 작품의 백미다.

정면에 3개 입구와 그 입구의 이름과 관련지어 만든 조각,

그 위에 유대 왕과 관련있는 조각이 들어서 있는 갤러리, 직경 10m에 가까운 장미창,

 그 위에 긴 열주, 좌우의 탑 등 양식은 고딕 건축의 전형으로 성당 건축의 규준이 되었다.

 오른쪽 출입구의 〈성모자 聖母子〉(1165~70경), 왼쪽 출입구의 〈성모대관 聖母戴冠〉(1210~20경),

중앙 출입구의 〈최후의 심판〉(1220~30경), 북쪽의 〈붉은 입구〉,

내진 주위를 장식한 진한 색깔의 〈그리스도전(傳)〉(14세기)이 유명하다.

 

이 성당은 나폴레옹의 대관식(1804), 파리 해방을 감사하는 국민미사(1944. 8. 26) 등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과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의 무대이기도 했다.

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 지도

 

대성당 우후방에 있는 세느강 교량 포인트에서 촬영한 대성당 측면사진

오른쪽 측면에 위치한 장미의 창

대성당 안에서 본 장미의 창

대성당의 뒷모습

세느강에 가까운 성당 광장 오른쪽에 위치한 샤를마뉴 대제 동상 

 

대성당 정면의 3개의 출입문 --왼쪽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나온다.

대성당 정면의 조각작품과

왼쪽 출입문 위와 주위의 부조와 환조 작품들

 

평상시는 굳게 닫힌 가운데 문 중앙 기둥은 예수님이 지키고 계신다.

대성당 내부의 전체 모습 -- 스테인드글래스의 영롱한 색깔이 신비롭다.

 

사방의 스테인드 글래스로 인해 신비로운 자연채광이 된다.

내진 주위를 장식한 진한 색깔의 〈그리스도전(傳)〉(14세기) 에수님의 일대기로 유명하다.

 

성당 안쪽 유물 전시장에는 대성당의 정교한 목제 모형이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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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빌라 Avila

 

스페인 마드리드 서쪽 87㎞ 떨어진  해발 1,132m 지점 아다하 강 유역,

 높은 그레토스 산맥(남쪽)과 과다라마 산맥(동쪽)으로 둘러싸여 있다.

로마 시대 이전에 형성된 정착지였으며 로마 시대에 아불라 또는 아벨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714년경 무어인들에게 넘어간 후 1088년 알폰소 6세가 그리스도교도들을 위해 이곳을 탈환했다.

길이가 2,500m인 다각형으로 된 이곳의 성벽은 12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고대 아빌라 전역을 에워싸고 있다.

아빌라는 '스페인에서 가장 훌륭한 중세의 유적'이라고 불려온 유명한 관광 중심지이다.

 

역사적인 유물로는

대장장이 후안 데 아르페 이 비야펜(16세기)의 작품이 보존되어 있는 고딕 양식의 대성당,

스페인 최초의 종교재판소장이었던 토마스 데 토르케마다의 무덤과

페르난도와 이사벨라의 외아들인 돈 후안의 무덤이 있는 산토토마스 수도원(1482~93),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비센테 바실리카,

아빌라 태생의 전설적인 인물 성 테레사의 집터에 세워진 엥카르나시온 수녀원 등이 있다.

아빌라 지도

 

멀리서 바라본 아빌라 성의 전경

높고 견고하며 수많은 돈대(감시초소)가 있어

난공불락의 성임을 실감할 수 있다. 

 

화강암으로 높고 견고하게 건설된 아빌라성과

성벽의 가장 높은 곳에  활쏘는 방어용 구멍

산비센테 대성당 (바실리카) --4세기에 순교한 San Vicente와 두 동생의 석관이 안치되어 있다.

 

성 밖에 있는 베드로 대성당과

성문 앞에 있는 대 데레사 성녀의 석상

 

성당의 일부 벽이 성벽인 카테드랄 성당

 

광장에서 쉬고있는 관광객들과 시청 건물

 

성 대 테레사의 집터에 세워진 엥카르나시온 수녀원

 

 

 

성녀 대 데레사가 두 동생을 아빌라성에서 데리고 나와 기도 했다는 기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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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뇌의 성모

바뇌의 성모 발현은 벨기에 동부 리에주에 있는 바뇌에 살았던 12세 소녀 마리에트 베코에게

발현성모 마리아를 가리키는 것이다.

1933년 1월 15일에서 3월 2일 동안 마리에트는 그녀의 가족과 지도신부에게

자신을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라고 칭한 순백의 옷을 입은 아름다운 부인을 보았다고 이야기했다.

그 부인은 고개를 약간 왼쪽으로 갸우뚱하면서 합장한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있었으며,

마리에트에게 “나는 고통을 받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왔다. 나를 믿어라. 나도 너를 믿겠다.”라고 말하였다.

성모는 마리에트를 작은 샘이 있는 곳까지 안내한 후,

이 샘을 치유의 샘이라고 부르며 “이 샘은 모든 백성들과 병자들을 위해서 보존되어 왔단다.”라고 말하였다.

이 치유의 샘이 있는 곳은 시간이 흘러도 수많은 순례자가 방문하고 있다.

오늘날 작은 샘은 매일 760여 ton 물이 용출되어 수많은 기적적인 치유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마리에트의 환시 사례는 1935년부터 1937년까지 벨기에 주교단이 공식적으로 조사하였다.

주교단이 작성한 보고서는 더 심층 높은 조사를 위해 로마에 제출되었다.

1942년 5월 리에주 교구장 케르크호프스 주교는 성모 발현의 신빙성을 처음으로 승인하였다.

1947년에는 교황청으로부터 성모 발현에 대한 공식 승인이 내려졌다.

성모 발현 이후, 마리에트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된 다른 성모 발현 목격자들과는 달리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며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았다.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참조>

파리에서 벨기에 바늬까지 가는 고속도로에서 본 풍경들

 

바늬 성지 주변의 목가적인 풍경

목장 가운데 있는 순례자들을 위한 속소

바늬의 성모상

성모님이 발현한 현장에 세워진 작은 성당과 마리에트 베코의 생가 

성당 앞의 봉헌대에 촛불을 봉헌하고 기도하는 참배객들 

성모님 발현이 그려진  발현성당의  유리 그림

성모상 아래 기적수 받는 곳

성지 앞 마당의 성모상과 부속 건물들

 

 

 

프랑스 신부님이 집전했던 미사 봉헌을 한 부속 성당의 제대

 

 

 

성지 곳곳에 있는 조각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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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성당

위키백과,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라틴어: Sanctus Ignatius de Loyola, 1491년 10월 23일 ~ 1556년 7월 31일)

또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스페인어: Ignacio de Loyola)는 스페인 바스크 귀족 가문의 기사이자

(1537년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은수자이자 사제, 신학자이다.

또한 그는 예수회의 창립자이자 초대 총장이기도 하다.

 이냐시오는 가톨릭 개혁 시기에 특출난 영적 지도자로 급부상하였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그의 충성은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교계제도에 대한 절대적인 순명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1521년 팜플로나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그는 회복을 위해 병상에 누워서 치료하는 동안

여러 가지 교회서적을 탐독하면서 깊은 회심을 하게 되었다.

특히 작센의 루돌프가 쓴 《그리스도의 생애》를 읽고 그는 지금까지의 군인 생활을 청산하고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위대한 영적 지도자의 본보기를 따라

여생을 하느님을 위한 일에 헌신하기로 다짐하였다.

1522년 3월 이냐시오가 몸을 추스르고나서 몬세라트의 성모 성당을 방문하였을 때,

성모 마리아아기 예수의 환시를 체험하였다.

이후 그는 고행의 복장을 하고 만레사에 있는 깊은 동굴 안에 들어가 머물면서 기도와 극기로 1년간의 세월을 보냈다.

또한 그는 고행과 문전걸식을 하며 가시 돋친 허리띠를 두르고 연일 단식을 하였다.

이와 같은 명상 생활을 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영신수련》이다.

1523년 9월, 이냐시오는 성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그곳에 머무르고자 하였으나,

당시 예루살렘 성소들을 관리하였던 프란치스코회원들이 받아들여주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유럽으로 돌아왔다.

1524년부터 1537년까지 이냐시오는 스페인과 파리에서 신학과 라틴어, 인문학 등의 공부에 전념하였다.

이냐시오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청빈과 순결, 순명을 맹세하며 결집하였다. 1539년 이들은 예수회를 조직하였으며,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1548년에는 이냐시오가 구성한 영신수련이 인가를 받았다.

이냐시오는 1556년 7월에 선종하였다. 1609년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1922년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영신수련과 피정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지정하였다.

이냐시오는 또한 군인들과 예수회원, 바스크 지방, 기푸스코아 주, 비스카야 주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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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찢기고 있는 조물주의 빼어난 창의력으로 창조된 자연풍광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모습 그대로를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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