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서 찍은 사진

눈 덮힌 알프스산맥에 뭉게구름이 걸려있다. 

 

스페인 마드리드 상공 -- 흰색의 벽에 붉은 색 지붕의 특유한 스페인풍의 건물이 특이하다

 

여름철인데도 얼음이 남아있는 몽고의 산악지대 호수인 모양

 

몽고 사막지대를 흐르는 강줄기의 모습 

 

 

중국상공의  댐 모습

 

널은 평야지대를 구비져 흐르는 강 모습이 이채로운 중국의 농촌 도시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중국의 해안도시의 모습

 

국제선 항공기 창을 통해 본 재미있는 사진을 올려 봅니다. ( 고도30,000ft에서 400mm렌즈 사용)

 

파리 사크레쾨르(예수 성심) 성당

평지인 파리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생 드니(Saint Denis) 성인의 순교지인 몽마르트 언덕에

1870년에 일어난 보불 전쟁 예수 성심에게 믿음의 충실한 표현을  위해 바칠 성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Sainte-Sophie)을 본뜬 로마 비잔틴 양식의 사크레쾨르 성당이 1914년에 완공되었다.

 

외관은 오래되고 빗물과 접촉할수록 하얗게 되는 특성이 있는 석회암으로 만들어져 순백색을 보이며, 

 정면 중앙에 그리스도의 동상이 있고 좌우에는 잔 다르크와 생루이의 청동 기마동상이 있으며,

성당의 입구 중간의 청동문에는 최후의 만찬을 비롯한 그리스도의 생애를 담은 장면들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스 십자가 모양을 한 성당 내부는 비잔틴 양식에 따라 바닥도 모자이크 장식으로 되어 있고,

성당 제대 뒤에는 넓이 475m2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리스도의 대형 모자이크가 있다.

 

 

 성당 뒷편의 높이 83m 종탑 안에는 무게 18.835t, 직경이 3m나 되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종이 있다.

 

몽마르트르 지도

 

거리의 화가와 길거리 음식으로 유명한 몽마르트 언덕

문학작품과 음악, 미술,  연극의 소재와 무대가 되고있는

사크레쾨르 성당 옆의 몽마르트 언덕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사크레쾨르(예수 성심) 성당

파리 시가지를 내려다 보는 몽마르트 언덕에 자리잡은 성당은

은백색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프랑스 국민들과 각국의 관광객 모두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큰길에서 약 240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앞 마당이 나오는

성당 중앙 높은 곳에는 예수의 석상이

아래편 좌우에는 잔 다르크와 생루이의 청동 기마동상이 있어

프랑스 국민들의 신심과 애국심을 고취시킨다.

 

 

성당 마당 오른쪽과 왼쪽에서 본 성당 모습도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성당 옆면의 섬세한 모습과

성당 뒷편의 종탑에는

프랑스 최대의 종이 있다.

 

성당의 뒷면

성당 뒷편에 있는 부속 건물

 

사크레쾨르 성당 옆에 있는 또 다른 성당.

베드로 사도의 동상과

어느 교황이거나 주교님의 석상 

 

화려하면서도 복잡한 스테인드 글래스와

보석같은 성물이 아름답다.

 

 

몽마르트 언덕 아래 위치한 미술관

미술관 노천에 있는

프랑스의 유명한 샹송가수인 달리다의 상반신 상과

 

  

몽마르트르의 도르상 거리 75번지 2호에 뒤띠욀이라는 이름의

벽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아주 특이한 재능을뛰어난 사람 조각 작품 

 

석고상일까?

진짜 사람일까요?

 

성당 앞 마당과 계단에 쉬면서 피로를 풀고 있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  파리외방전교회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        
 
 
출처 : [가톨릭대사전]  참조

 외방전교회는  파리에1658년 7월 29일 창설된 후,

1831년 9월 한국에 처음 진출하여 한국천주교회의 초창기 발전은

물론 교회를 통하여 한국 민족과 고락을 같이 한 선교단체이다.

   한국진출 : 1825년 사제 파견을 요청하는 한국인 교우들의 편지를 접하게 된 교황은

1827년 9월 1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였고,

파리 외방전교회 역시 프랑스혁명 때문에 회원이 10여명 밖에 없었고 돈도 없어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방콕의 보좌주교이던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는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그는 1831년 9월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초대 조선대목(朝鮮代牧)으로 임명되자

즉시 입국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 3년이 지난 뒤 만주에 도착하였지만

한국 입국의 많은 어려움 때문에 1835년 10월 한국을 바라보면서 만주의 교우촌 마가자(馬架子)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836년 모방(Maubant, 羅) 신부, 1837년에 2대 조선대목인 앵베르(Imbert, 范) 주교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입국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의 본래 목적에 따라 3명의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에 보내 신학 교육을 받고 사제서품을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1845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배출되었다.

   이에 앞서 1839년 1월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시작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39년 9월에는 마침내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3명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그 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한국의 입국을 시도하

1845년 10월 3대 조선대목 페레올(Ferreol, 高) 주교, 다블뤼(Daveluy, 安) 신부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충청도 강경(江景)에 도착하였다.

 

 

1846년 병오(丙午)박해를 치른 뒤 1866년 병인(丙寅)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하여 메스트르(Maistre, 李),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푸르티에(Pourthie, 申), 페롱(Feron, 權),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볼리외(Beaulieu, 徐),

도리(Dorie, 金), 위앵(Huin, 閔) 신부 등이 계속 입국하였지만 1866년 병인년 대박해가 일어나자

모두 순교하고 살아남은 3명 선교사도 중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10년이 지난 1877년이 되어서야 다시 한국에 입국할 수가 있었다.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 전경

 

전교회 성당

 

성당 내부

 

파견 선교사들이 성모님의 보호와 은총을 비는 성모

성모당에 모셔져 있는 성모자 대리석 상

 

명동 주교자 성당 신자들이 기증한 한국순교성인현양비

 

감사의  표시로 기증한 동종

전교회 정원에 있는 성상들

파리 시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이름모를 성당들

 

기적의 메달 성당 , Chapelle Notre-Dame de la Médaille miraculeuse

 

기적의 메달은 성모 마리아가 파리에 있는 성 빈첸시오 바오로 자비 수녀원 내 소성당에 발현하여

 카타리나 라부레(Sainte Catherine Labouré) 수녀에게 직접 준 메달을 말한다.

1830년 7월 18일~19일 저녁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에게 처음 성모의 발현하셨

1830년 11월 27일 성모의 두 번째 발현 때 이 메달을 성모께서 라부레 수녀에게 보여 주면서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커다란 은총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로 인해 기적의 메달 성당은 소성당이지만 성모의 발현지로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신자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성당 내 제대 위에는 성모의 첫 번째 발현 장면이 그려져 있고

정면에는 메달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의 성모 마리아상이 있다.

우측에는 두 번째 발현을 조각한 모습이 있으며

그 밑에는 사망한 후 57년이 지나 시복을 위한 시신 발굴 당시(1933년)

전혀 부패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된  라부레 수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기적의 메달 성당에서 봉헌한 순례 감사 미사

   아담한 파이프 올갠이 설치되어 있는 2층 뒷편

포르투갈 성모 발현지 파티마 광장 

성모 발현지인 파티마의 광장은 동쪽의 대성당과 서쪽의 삼위일체 대성당 사이에

길이는 500m가 넘고(본인의 짐작), 폭은 약 240m로 바티칸 베드로 광장의 2배가 넘는다고 하며,

수용인원이 약 30만이라고 하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문시에는 100만이 모였다고 한다.

 

대성당 가까이 있는 예수 성심상에서  삼위일체 대성당 쪽으로 바라본 광장 

대성당 앞에서 바라본 광장 -- 오른쪽 흰 부분이 무릎 걸음으로 기도를 바치는 고행의 길이다.

 

광장의 바닦 --사방 약 10 cm 정사각형 돌을 심어 만들었다.

 

성모님이 발현한 위치에 있는 상수리나무 -- 원래 나무는 고사하고 아들나무라고 함.

 

촛불 봉헌소

 

성모님 발현 장소에 건립된 소성당

제대 뒤 유리관 속의 성모상이 있는 곳이 발현장소라고 함

주교님의 집전으로 매일 저녁 미사가 봉헌됨 

순례객들이 참여하는 촛불 행렬에 나서기 전의 장미 꽃다발 위의 성모상

 

왼쪽의 소성당을 출발하여 예수성심상을 돌아 대성당 앞을 지나 다시 소성당으로 오는 행렬을 한다.

촛불 행렬에 나서는 성모상

 

촛불행렬에 나서는 각국의 순례객들은 모국어로 묵주의 기도 1단씩을 바친다.

감동하고 은총을 많이 받는다는

수많은 각국에서 온 성지 순례객들

 

 

포르투갈 파티마 성삼위일체 대성당

드넓은 파티마광장 서쪽 끝자락에 있는 삼위일체 성당 (Basilica da Santissima Trindade)은 

2007년 10월에 준공한 수용인원 8,500명 세계에서 4번째 큰 성당이다.

 성당 입구에는 독일 출신의 포르투갈 거주민이 기부한 베를린 장벽 조각,

공산주 의 몰락을 도운 신에게 쳐진 공물이 있다. 

수십가지 언어 로 성서의 구분을 적어 넣은창문,

각각의 사도에게 바쳐진 성서 인용구가 적힌 12개 청동문이 있다.

내부에는 슬로베니아 예술가 마크로 이반 루프니크의 모자 이크 작품,

아일랜드의 예술가 캐서린 그린의 예수그리스도를 묘사한 제단 뒤 장 식이 있다고 한다.

 

성삼위일체 대성당 외관은 높이 20m의 콘크리트로 된 창고같은 느낌이다.

 

 

성삼위일체 대성당 오른쪽 광장에서 대성당을 바라보고 있는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의 동상

 

성삼위일체 대성당 입구에서 보이는 광장 너머의 대성당

 

세계 각국의 언어로 성경 구절이 기록되어 있는 벽면 -- 중간 쯤에 한글도 보인다.

제대의 검은 예수상

제대 아래에 바티칸에서 기증한 베드로 사도의 뼈조각이 봉헌되어 있다.

 

광장 서남쪽에 서 있는 현대적 감각의 십자고 상

 

공산주의의 몰락을 상징하는 무너진 베를린 장벽 조각

 

미카엘 대천사와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세 아이들을 상징하는 현대 감각의 조각작품

 

유럽성지순례 -- 포르투갈 파티마 대성당

 

파티마 성모발현지는  1917년 5월부터 10월까지 매달 13일 3명의 어린 목동 앞에 성모님이 발현하여 

죄의 회개와 로사리오의 기도를 권고한 사건으로 이 후  순례지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30년 레이리아의 주교가 신빙성을 인정하면서 ‘파티마의 로사리오 성모’ 발현지로 공인되었다.

포르투갈 파티마 성모발현지 대성당은1928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대성당의 건축을 시작하여 

1953년 10월에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로사리오 대성당이라고도 하는데, 묵주의 기도 15개의 경당(소성전) 과

성당 전면 양옆에는 발현 목격자 3명의 무덤이 있으며,

대형 수정십자가 아래 7t 무게의 황금관이 올려져 있는 높이 약 65m의 종탑이 있다.

대성당 양쪽에 주랑이 있어 수녀원과 병원이 있는 건물을 포함한 여러 채의 건물과 연결해 주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성모가 발현했던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

 이웃한 넓은 산책로인 코바에는 순례자들이 모여드는데 이 주변이,

성모님이 어린이들 앞에 발현했다고 믿어지는 장소에 작은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파티마 지도

10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광장 동편에 자리한 대성당

대성당 앞에 서 있는 예수 성당은 순레자들을 축복하는 모습이다.

천상모후의 관을 쓰시는 성모님이 묘사되어 있는 천정 부조작품과  성당 중앙제대

 

성당 안에는 성모님 발현을 경험했던 루치아와 프란치스코의 무덤이 있다.

예수님의 생애를 내용으로 하는 14처 경당이 대성당 양쪽에 마련되어 있어

소수의 신자들이 따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

규모가 꽤 큰 파이프 올갠

대성당 종탑 중간 부근에 손에 묵주를 건 성모님의 모습이 참 자애로워 보인다.

멀리서나 가까이서 보아도 너무나 성스럽고 아름다운 대성당

성당 뒷편의 아침 일출 모습이 인상적이다.

저녁 촛불 행진 때의 대성당 야경

 

파티마 로터리에 있는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루치아, 프란치스코, 히야친타와 양의 대리석상 

 

1917517일 파티마에서 1.6떨어진 알주스트렐 마을 근처 '이레네의 골짜기'라는 목초지에서

세 명의 양 치기 어린이들에게 발현한  성모 마리아를 목격한 곳의 성모상.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곳의 발현광경을 형상화한 조형물 

 

루치아의 생가

루치아가 기거하던 방

평화의 천사인  '포르투갈의 천사'가 1916년 여름 두번에 걸쳐 나타난 루치아 생가 정원의 우물

 

루치아 성녀의 초상화와 사진들

 

사촌인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의 집

 

 

 

예술의 도시인 아름다운 파리를 대표하는 상징물들의 사진 모음....

 

세느강 시떼 섬의 노트르담 대성당과

몽마르트 언덕에 우뚝 솟아 자리한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위용.

 

군사박물관인 앵버리지 뒷편에 붙여 건축된 나폴레온의 시신이 안치되어있는 돔 성당.

 

거리의 예술가들로 유명한 몽마르트 언덕

 

파리 오페라좌 극장 (차창 사진)

마치 그리스 신전을 옮겨다 놓은 듯한 마들렌 성당.

 

콩코드광장의 이집트에서 선물받은 오벨리스크와 프랑스 국회의사당

방사형 도시인 파리의 8개의 대로가 중심인 개선문을 중심으로 모인다.

위는 낭만의 거리인 상제리제이고

아래는 파리의 상징물 중 상징물인 개선문이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 아래에 있는 무명용사의 무덤에 놓여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멀리서 에펠탑을 감상하기 좋은 파리 인류사 박물관

<그날도 광장에서는 인도계 인들의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인류사 박물관 옆 광장에서 바라본 에펠탑 전경

 정문에서 본 에펠탑과 나폴레온 기마상

세느강 유람선에서 가까이서 본 에펠탑

 

세느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량인 알렉상드르 3세교와 정면의 앵벌리지

앵벌리지는 군사병원으로 건립했으나 지금은 군사박물관으로 쓰이며  

뒷편 중앙의 돔은 나폴레온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돔 성당이다.

 

세느강 관강유람선이 아름다운 알렉상드르 3세교를 지나고 있다.

 

 

 

100년의 역사를 가진 거미줄처럼 얼킨 파리 지하철의 지상구간

 

유람선에서 스쳐가면서 본 건물 -- 루브르 박물관(?)

 

 

노트르담 대성당 Notre-Dame de Paris

파리 센 강의 시테 섬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은 규모와 역사로 유명하며, 고고학과 건축학적 관심의 대상이다.

 파리 주교 모리스 드 쉴리가 이전에 있던 2개의 바실리카식 성당을 합쳐 하나의 큰 건물을 지을 계획을 세웠고,

 1163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머릿돌을 놓고 1189년 대제단이 봉헌되었다.

서쪽 앞면의 성가대석과 네이브[身廊]는 1240년 완공되었고

그뒤 100여 년에 걸쳐 포치(porch 돌출 지붕 건물의 출입구),  성전과,

그밖의 여러 장식물들을 지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수세기를 지나면서 흠집이 생기고 약해졌으며 18세기 프랑스 혁명 때 크게 파손되어,

19세기에 서쪽 정면 '그랜드 갤러리'의 28개 조상과 3개 출입문 측벽에 서 있는

조상 등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다.

트랜셉트[翼廊]와 네이브 사이에 높이 솟은 첨탑은 19세기에 복원된 것이다.

전체 길이 130m, 폭 48m, 천장 높이 35m, 탑 높이 69m의 대건축물로

4각형 쌍탑  위에 뾰족탑을 덧붙이기로 되어 있었으나 아직 그대로이다. 

지름 9m의 '장미의 창'은 스테인드 글래스 작품의 백미다.

정면에 3개 입구와 그 입구의 이름과 관련지어 만든 조각,

그 위에 유대 왕과 관련있는 조각이 들어서 있는 갤러리, 직경 10m에 가까운 장미창,

 그 위에 긴 열주, 좌우의 탑 등 양식은 고딕 건축의 전형으로 성당 건축의 규준이 되었다.

 오른쪽 출입구의 〈성모자 聖母子〉(1165~70경), 왼쪽 출입구의 〈성모대관 聖母戴冠〉(1210~20경),

중앙 출입구의 〈최후의 심판〉(1220~30경), 북쪽의 〈붉은 입구〉,

내진 주위를 장식한 진한 색깔의 〈그리스도전(傳)〉(14세기)이 유명하다.

 

이 성당은 나폴레옹의 대관식(1804), 파리 해방을 감사하는 국민미사(1944. 8. 26) 등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과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의 무대이기도 했다.

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 지도

 

대성당 우후방에 있는 세느강 교량 포인트에서 촬영한 대성당 측면사진

오른쪽 측면에 위치한 장미의 창

대성당 안에서 본 장미의 창

대성당의 뒷모습

세느강에 가까운 성당 광장 오른쪽에 위치한 샤를마뉴 대제 동상 

 

대성당 정면의 3개의 출입문 --왼쪽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나온다.

대성당 정면의 조각작품과

왼쪽 출입문 위와 주위의 부조와 환조 작품들

 

평상시는 굳게 닫힌 가운데 문 중앙 기둥은 예수님이 지키고 계신다.

대성당 내부의 전체 모습 -- 스테인드글래스의 영롱한 색깔이 신비롭다.

 

사방의 스테인드 글래스로 인해 신비로운 자연채광이 된다.

내진 주위를 장식한 진한 색깔의 〈그리스도전(傳)〉(14세기) 에수님의 일대기로 유명하다.

 

성당 안쪽 유물 전시장에는 대성당의 정교한 목제 모형이 만들어져 있다.

 

아빌라 Avila

 

스페인 마드리드 서쪽 87㎞ 떨어진  해발 1,132m 지점 아다하 강 유역,

 높은 그레토스 산맥(남쪽)과 과다라마 산맥(동쪽)으로 둘러싸여 있다.

로마 시대 이전에 형성된 정착지였으며 로마 시대에 아불라 또는 아벨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714년경 무어인들에게 넘어간 후 1088년 알폰소 6세가 그리스도교도들을 위해 이곳을 탈환했다.

길이가 2,500m인 다각형으로 된 이곳의 성벽은 12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고대 아빌라 전역을 에워싸고 있다.

아빌라는 '스페인에서 가장 훌륭한 중세의 유적'이라고 불려온 유명한 관광 중심지이다.

 

역사적인 유물로는

대장장이 후안 데 아르페 이 비야펜(16세기)의 작품이 보존되어 있는 고딕 양식의 대성당,

스페인 최초의 종교재판소장이었던 토마스 데 토르케마다의 무덤과

페르난도와 이사벨라의 외아들인 돈 후안의 무덤이 있는 산토토마스 수도원(1482~93),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비센테 바실리카,

아빌라 태생의 전설적인 인물 성 테레사의 집터에 세워진 엥카르나시온 수녀원 등이 있다.

아빌라 지도

 

멀리서 바라본 아빌라 성의 전경

높고 견고하며 수많은 돈대(감시초소)가 있어

난공불락의 성임을 실감할 수 있다. 

 

화강암으로 높고 견고하게 건설된 아빌라성과

성벽의 가장 높은 곳에  활쏘는 방어용 구멍

산비센테 대성당 (바실리카) --4세기에 순교한 San Vicente와 두 동생의 석관이 안치되어 있다.

 

성 밖에 있는 베드로 대성당과

성문 앞에 있는 대 데레사 성녀의 석상

 

성당의 일부 벽이 성벽인 카테드랄 성당

 

광장에서 쉬고있는 관광객들과 시청 건물

 

성 대 테레사의 집터에 세워진 엥카르나시온 수녀원

 

 

 

성녀 대 데레사가 두 동생을 아빌라성에서 데리고 나와 기도 했다는 기도처

 

 

 

살라망카 Salamanca

스페인 서부 살라망카 주, 토르메스 강 연안과 북쪽 기슭의 구릉 지대에 자리한

스페인에서 가장 유서 깊고 예술적인 도시이다.

8~11세기에 그리스도교도들과 무어인들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으며,

1087~1102년 그리스도교도들이 다시 이주해왔다.

1178년 레온의 페르난도 2세가 이곳에서 의회를 소집해 왕국에서 2번째로 이곳에 푸에로(특권)를 칙허받았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구(舊)대성당(1140경 착공)과 신(新)대성당(1513 착공, 18세기 완공)을 비롯해

유서 깊고 훌륭한 유적들이 많이 있다.

 

 

살라망카 대성당 가는 길에서 촬영한 차창사진들

 

살라망카 신대성당[Salamanca New Cathedral]

스페인 살라망카의 아나야 광장(Plaza Anaya)에 있는 대성당으로 

1513년 아라곤(Aragon)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2세(Fernando II)의 명령에 따라 건축을 시작해

220년이 지난 1733년에 완성한 대성당이다.

부분적으로는 여러 건축 양식이 섞여 있으나 주된 양식은 후기 고딕과 바로크 양식이다.

처음 건축을 시작한 페르난도 2세 이후 역대 국왕들이 대대로 대성당 조성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거대한 규모로 완성됐는데 살라망카 구대성당(La Catedral Vieja de Salamanca)과 인접해 있다.

 신구 대성당 모두 에스파냐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사적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있는 신대성당은 건축적으로 뛰어난 부분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는 수많은 섬세한 조각 장식으로 화려하게 조성한 정면,

반구형 지붕으로 덮인 아름다운 대규모 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모습과 수많은 성인상이 조각된 유명한 대형 출입문,

내부 제단 뒤편에 있는 대형 장식 벽의 황금빛으로 휘황찬란한 조각 장식 등을 들 수 있다. 

그 밖에도 하나하나가 모두 걸작품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조각품 등이 많다.  

 

성당 정면에서 바라본 돔과 첨탑에

복잡하면서도 섬세한 조각 장식이 아름답다.

출입문 주위의 조각 작품들.

1990년 대 복원 수리 작업시 조각해 놓은 우주인

성당 내부의 화려한 장식들과 성 조각품들과 성화들

 

 

 

 

 

 

 

화려한 천정과 중앙 돔의 천정화와  장식

 

엄청난 굵기의 성당 내부의 기둥들

 

규모가 어마어마한 파이프 올갠

 

 

살라망카 구 대성당

 

산티아고 순례길의 시발점인 살라망카 조가비의 집과 길 위의 순례길 표지

살라망카 대학교(?)

 

다른 날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대성당

 

아름다운 일몰

 

살라망카 대성당의 야경은

은은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이다

 

마요르 광장

세계 10대 광장이기도 하며 007 영화 시리즈의 배경 무대가 되기도 한

1729~33, 알베르토 데 추리게라가 설계하고 안드레스 가르시아 데 키뇨네스가 완공시킨

회랑이 있는 아름다운 마요르 광장은 지금도 이 도시의 중심지이다.

처음에는 투우장으로 가끔 사용하기 위해 지은 이 광장은 스페인의 역대 왕들과

프랑코 장군의 큰 메달이 양쪽에 장식되어 있는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광장의 주요 건물인 알베르토 데 추리게라가 설계한 시청사.

 

 

2009년 유럽성지순례 여행시 스페인의 아름다운 풍경들....

좀체로 보기 힘든 핵발전소

스페인 전통 농촌 주택

시골 마을 -- 마음의 중심에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소도시의 로타리 분수대

유럽대평원의 비옥한 농토와 마을의 공동묘지

주변에 올리브 나무가 무성한 소도시

한적하기까지 한 간선도로

 

 

로마시대에 건설된 도시인 메디아

                    스페인 서부 에스트레마두라 지방 바다호스 주에 있는 도시로, 

 BC 25년에 로마인들이 세운 아우구스타에메리타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의 포르투갈을 둘러싼 로마의 속주인 루시타니아의 수도로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9만 명의 주둔군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로마의 유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1세기말경 화강암으로 건축된 다리로,

 686년과 1610년에 각각 서고트족과 펠리페 3세에 의해 복구되었다.

길이가 785m인 이 다리는 81개의 아치로 되어 있었지만, 그

중 17개는 1812년 프랑스의 바다호스 포위공격중에 파괴되었다.

로마 신전들의 잔재와 이 도시를 둘러싼 거대한 벽의 잔재가 조금 있으며,

이외에도 흔히 '아르코데트라하노'라고 불리는 로마 개선문과 제2로마교가 있다.

북쪽으로 5㎞ 떨어진 곳에 고대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큰 저수지인 판타노데프로세르피나에서

로스밀라그로스라 알려진 매우 튼튼한 송수로를 통해 메리다로 물이 운반되었는데,

이 송수로의 많은 부분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원형극장과 원형경기장의 흔적도 있다.

경제는 농산물교역과 관광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메디아 입구 강에 건설된  오래된 교량과 최신 교량

 

고대로마도시임을 암시하는 도로변의 여성조각과 고적에서 출토된 석상으로 유적지임을 알리는 조형물

로마시대 유적--고성과 주택의 흔적, 원형경기장의 흔적 등이 남아있다.

 

 

경기장 -- 주로 투우경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함.

메리다 박물관 입구

 

특산물인 하몽

 

 

멀리 눈덮힌 크레도스(황소)산맥 아래 넓은 농토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있는 광경이 평화롭다.

 

시골 마을의 중심엔 곳엔 고성과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눈 덮힌 크레도스 산맥

 

                   바뇌의 성모

바뇌의 성모 발현은 벨기에 동부 리에주에 있는 바뇌에 살았던 12세 소녀 마리에트 베코에게

발현성모 마리아를 가리키는 것이다.

1933년 1월 15일에서 3월 2일 동안 마리에트는 그녀의 가족과 지도신부에게

자신을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라고 칭한 순백의 옷을 입은 아름다운 부인을 보았다고 이야기했다.

그 부인은 고개를 약간 왼쪽으로 갸우뚱하면서 합장한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있었으며,

마리에트에게 “나는 고통을 받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왔다. 나를 믿어라. 나도 너를 믿겠다.”라고 말하였다.

성모는 마리에트를 작은 샘이 있는 곳까지 안내한 후,

이 샘을 치유의 샘이라고 부르며 “이 샘은 모든 백성들과 병자들을 위해서 보존되어 왔단다.”라고 말하였다.

이 치유의 샘이 있는 곳은 시간이 흘러도 수많은 순례자가 방문하고 있다.

오늘날 작은 샘은 매일 760여 ton 물이 용출되어 수많은 기적적인 치유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마리에트의 환시 사례는 1935년부터 1937년까지 벨기에 주교단이 공식적으로 조사하였다.

주교단이 작성한 보고서는 더 심층 높은 조사를 위해 로마에 제출되었다.

1942년 5월 리에주 교구장 케르크호프스 주교는 성모 발현의 신빙성을 처음으로 승인하였다.

1947년에는 교황청으로부터 성모 발현에 대한 공식 승인이 내려졌다.

성모 발현 이후, 마리에트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된 다른 성모 발현 목격자들과는 달리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며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았다.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참조>

파리에서 벨기에 바늬까지 가는 고속도로에서 본 풍경들

 

바늬 성지 주변의 목가적인 풍경

목장 가운데 있는 순례자들을 위한 속소

바늬의 성모상

성모님이 발현한 현장에 세워진 작은 성당과 마리에트 베코의 생가 

성당 앞의 봉헌대에 촛불을 봉헌하고 기도하는 참배객들 

성모님 발현이 그려진  발현성당의  유리 그림

성모상 아래 기적수 받는 곳

성지 앞 마당의 성모상과 부속 건물들

 

 

 

프랑스 신부님이 집전했던 미사 봉헌을 한 부속 성당의 제대

 

 

 

성지 곳곳에 있는 조각상들

 

 

 

 

 

 

 

 

프랑스 성모발현지 루르드(Lourdes)

 프랑스의 피레네 산맥 기슭에 위치하며 급류인 가브드포 강의 양안으로

 발전된 루르드는 중세시대에 그 성채와 함께 전략적 요새를 이루었다.

백년전쟁중 프랑스가 18개월에 걸친 포위공격 끝에 1406년 잉글랜드로부터 빼앗았다.

오늘날의 루르드가 지니고 있는 중요성은 1858년부터 시작된다.

그해 2월 11일에서 7월 16일 사이에 베르나데트 수비루라는 14세의 소녀가

루르드에서 가까운 가브드포 강 좌안의 마사비엘 동굴에서 성모 마리아의 환영을 수차례 목격했다.

1862년 교황이 그 환영은 진짜 계시라고 선포하여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 숭배가 공인받게 되었다.

베르나데트에게 계시된  동굴의 지하 샘물은 불치병에 기적적인 효과가 있는 것으로 선포되어, 그

때부터 루르드는 순례의 대중심지가 되었다.

매년 환자나 불구자 5만여 명을 포함하여 거의 300만 명의 순례자들이 매년 이곳을 찾고 있다.

 

1876년 동굴 위에 세워진 바실리카가 많은 수의 순례자들로 점점 비좁게 되자

1958년에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프리스트레스트 콘크리트 지하교회가 세워졌다.

 

1876년 동굴 위에 세워진 바실리카(대성당)

대성당 돔 위의 황금관

성전 제대

 

성전 돔의 천정화와 묵주의 기도 벽화

 

 

대성당 전면에 모자이크로 된 빛의 신비

야간 십자가의 길 기도 --성모상을 앞세우고 촛불을 켠째

순례객 각국가의 언어로 1단씩을 외우며 광장을 행진한다.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마리아 발현사건, 베르나데트 성녀와 마시비엘동굴 

  

성모마리아 발현사건은 최고의 미스테리현상이 아닐 수가 없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성모마리아 발현현상이 신의 존재와 종교적 축복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아주 좋은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와 20세기에 몇 건의 유명한 성모마리아 발현현상들이 보고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특별한 관심을 끌기도 했다.

파티마 성모마리아 발현가리반달 성모마리아 발현현상이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유명한 성모마리아 발현현상이다.

 그보다 훨씬 전인 1858년에 이미 프랑스 루르드지역에서 성모마리아 발현현상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유명한 루르드 성모마리아 발현으로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던 사건이다.

 

프랑스 루르드동굴에서 성모마리아를 보았던 베르나데트는 그 일을 계기로 해서 나중에 수녀가 되었으며,

더욱 놀라운 일은 그녀가 1879년 사망한 후에 일어나게 되었는데,

베르나데트수녀의 시신이 137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썩지않는  시신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1844년 프랑스 피레네산맥 북쪽 산악지역의 작은마을 루르드지역에서 가난한 제분업자의 맏딸로

태어난 베르나데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심부름을 잘하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녀였다. 

14살 소녀 베르나데트는 어느날 동생 마리와 친구 잔느와 함께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기슭에 있는 마시비엘동굴 근처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 가브강가 부근에서 동생과 잔느가 먼저 앞서간 채로 홀로 남아있던 베르나데트는

마사비엘동굴쪽에서 폭풍이 휘몰아치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게된다. 

마사비엘동굴 부근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게 폭풍이 몰아치는 그 사이에,

갑자기 새하얀 광채를 내뿜는 한 여인의 형체가 베르나데트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동굴앞 장미덤불 위에서 나타난 그 여인은 베르나데트에게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여인은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며, 하얀색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푸른색띠를 두르고 하얀빛깔의 묵주를 팔에 두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 순간 베르나데트는 너무 놀라서 묵주를 꺼내들고 묵주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녀는 베르나데트에게 2주 동안 계속 이동굴로 찾아오라고 말하면서 홀연히 사라졌다. 

그후 베르나데트는 그 여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계속 마사비엘동굴로 찾아갔으며, 그곳에서 그 빛나는 여인을 만나 묵주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날,

베르나데트가 만난 그 여인은 동굴앞에 있는 작은 흙탕물을 가리키면서,

베르나데트에게 그물을 마시고 몸을 씻으라고 말했다.

베르나데트는 그 흙탕물이 있는 곳으로 가서 땅을 파헤치자 엄청난 양의 샘물이 쏟아져 나왔다.

  베르나테트는 그 여인의 지시대로 그 샘물을 마시고 샘물로 목욕을 했다고 한다.

베르나데트 수비루가 샘물을 마신 직후 그녀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만성적인 천식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 샘물이 그 유명한 루르드샘물이며, 그후 불치병에 걸린 수많은 환자들을 치유해준

기적의 샘물로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된다.

 

그렇다면 베르나데트에게 나타났던 그 여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느날 동굴로 찾아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베르나테트는  여인에게 이름을 물어보았다고 한다.

베르나데트의 세번째 반복질문에도 계속 침묵하던 그여인은 베르나데트의 네 번째질문이 이어지자,

비로소 나는 원죄없는 잉태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여인의 말대로 원죄없는 잉태한 여인이라면 바로 성모마리아를 뜻하는 것이다.

이세상에 원죄없이 잉태한 분은 예수님과 성모마리아뿐이기 때문이다.

 

마사비엘동굴에 나타나는 여인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있었던 교황청은

1860년 루르드사건에 대한 심층적인 조사를 벌인 끝에,

베르나데트 앞에 나타나신 분이 성모마리아임을 공인해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베르나데트의 성모발현 소식이 프랑스와 유럽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수많은 난치병환자, 불치병환자들이 이곳을 찾아오게 되었고,

이 동굴의 샘물을 마시고 병에서 완치되는 놀라운 기적들이 계속 일어났다고 한다.

 베르나데트수녀는 수녀원에서 생활하는 동안

자신의 지병인 천석이 다시 재발해서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했으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면서 자신을 혹사시킨 끝에,

1879년도 35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그녀가 사망하고 30년이 지난 후에 그녀의 시신을 옮기기 위해서

교황청 조사관이 그녀의 관을 개봉해보았다가 엄청 놀랐다고 한다. 

죽은 지 30년이 지난 베르나데트수녀의 시신이 전혀 썩지않고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르나데트수녀가 1879년도에 사망했으니 지금까지 137년이라는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성 길다드수녀원에 안치되어 있는 베르나데트수녀의 시신은

그녀가 살아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 전혀 부패되지 않고 깨끗한 모습으로 누워있다고 한다.

  베르나데트수녀의 시신은 기적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다.

 

베르나데트수녀가 생전에 성모마리아를 만났을 때, 성모마리아로부터 들었다는 말이 있는데,

'네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큰 고통이 따르겠지만, 다음 세상에서는 큰 행복을 누릴 것이다라는

성모마리아의 말이 실현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1920년대 그녀의 시신이 썩지않는다는 사실이 발견된이래로,

많은 학자들과 과학자들이 머리를 싸메고 베르나데트수녀의 썩지않는 시신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수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어 왔지만 현재까지 정확한 원인규명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 

한마디로 말해서 베르나데트수녀의 시신이 썩지않는 이유는 과학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이며,

기적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영원히 썩지않는 베르나데트수녀의 시신은 인류가 겪은 사건 중에

최대의 미스테리한 현상이라고 보여진다.

유품 전시관 앞의 베르나데트성녀 석상

 

초기 루드르의 모형과 사진자료

 

전시관의 성녀의 일생 스테인드글래스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성녀의 수녀복

성녀가 생활했던 수녀원과 성녀의 유품

성녀가 첫영성체를 한 성당

 

 

프랑스 루르드의 마사비엘동굴

침수장-- 수많은 참배객이 봉사자의 도움으로 침수한다.

 

프리스트레스트 콘크리트 지하교회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성당

위키백과,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라틴어: Sanctus Ignatius de Loyola, 1491년 10월 23일 ~ 1556년 7월 31일)

또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스페인어: Ignacio de Loyola)는 스페인 바스크 귀족 가문의 기사이자

(1537년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은수자이자 사제, 신학자이다.

또한 그는 예수회의 창립자이자 초대 총장이기도 하다.

 이냐시오는 가톨릭 개혁 시기에 특출난 영적 지도자로 급부상하였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그의 충성은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교계제도에 대한 절대적인 순명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1521년 팜플로나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그는 회복을 위해 병상에 누워서 치료하는 동안

여러 가지 교회서적을 탐독하면서 깊은 회심을 하게 되었다.

특히 작센의 루돌프가 쓴 《그리스도의 생애》를 읽고 그는 지금까지의 군인 생활을 청산하고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위대한 영적 지도자의 본보기를 따라

여생을 하느님을 위한 일에 헌신하기로 다짐하였다.

1522년 3월 이냐시오가 몸을 추스르고나서 몬세라트의 성모 성당을 방문하였을 때,

성모 마리아아기 예수의 환시를 체험하였다.

이후 그는 고행의 복장을 하고 만레사에 있는 깊은 동굴 안에 들어가 머물면서 기도와 극기로 1년간의 세월을 보냈다.

또한 그는 고행과 문전걸식을 하며 가시 돋친 허리띠를 두르고 연일 단식을 하였다.

이와 같은 명상 생활을 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영신수련》이다.

1523년 9월, 이냐시오는 성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그곳에 머무르고자 하였으나,

당시 예루살렘 성소들을 관리하였던 프란치스코회원들이 받아들여주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유럽으로 돌아왔다.

1524년부터 1537년까지 이냐시오는 스페인과 파리에서 신학과 라틴어, 인문학 등의 공부에 전념하였다.

이냐시오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청빈과 순결, 순명을 맹세하며 결집하였다. 1539년 이들은 예수회를 조직하였으며,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1548년에는 이냐시오가 구성한 영신수련이 인가를 받았다.

이냐시오는 1556년 7월에 선종하였다. 1609년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1922년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영신수련과 피정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지정하였다.

이냐시오는 또한 군인들과 예수회원, 바스크 지방, 기푸스코아 주, 비스카야 주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성 바오로 대성당

 


 바오로 사도가 로마에 와서 당시의 로마 황제였던 네로에게 재판을 받고 순교한 시기는

 

64년에서 67년 사이라고 추정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사도가 처형당한 직후 그의 시신은 당시 열심한 신자로

 

사도를 따르던 루치나 부인 가문의 소유지에 묻혔다.

 

그 후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사도 베드로의 무덤과 함께 비밀리에 관리해 오다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 박해를 끝낸 후

 

사도의 무덤 위에 기념 대성당을 지었다.

 

 

현재의 대성당과 같은 규모는 그 후 386년 당시 열렬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테오도시우스 로마 황제와 그의 아들 아르카디우스가

 

당시 로마의 총독이었던 살루스티우스에게 사도의 기념 성당을 확장하도록 명했다.

 

 건축 설계 전문가였던 치리아데에게 설계를 의뢰하였는데,

 

그는 대성당 내부에 다섯 군데에 통로를 만들고,

 

 80개(24개는 로마 공회당에서 가져옴)의 기둥을 세웠다.

 

10세기 이전의 성당들은 대부분  정면에 정원을 꾸미고 분수를 만들었는데,  

 

그 의미는 세례성사의 중요성을 되살리기 위해

 

이곳에서 물로 죄를 씻은 후  성전에 들어가야 된다는 뜻이다

 

 

마치 사도 베드로의 무덤위에 세웠던 콘스탄티누스의 기념 성당과

 

그 구조나 모양을 비슷하게 설계했다.

 

현재의  대성당의 규모는 1600여년 전에 지었던 규모 그대로이다.

 

대성당은 세기를 거듭하는 동안 수차례에 걸쳐 수난을 당했다.

 

그 중 중요한 사건들을 살펴보면, 461년 벼락으로 인해 커다란 피해를 입었고,

 

739년에는 롬바르크족의 침입으로 약탈을 당했다.

 

801년에는 지진으로 천장이 내려앉는 것을 보수했고,

 

847년에는 사라센인들의 침입으로 또다시 약탈당했다.

 

 결정적인 피해를 입게 된 것은 1823년 7월 15일과 16일 밤중에 일어난 대화재였다.

 

이로인해 십수세기를 지탱해 오던 대성당은 하루 아침에 완전히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대화재로 말미암아 대성당 건물은 물론이고, 내부에 그려져 있던 벽화를 비롯하여

 

모자이크 등 역사적인 보물은 거의 다 손실되었거나 파괴되었다.

 

레오 12세 교황은 즉위하자 곧 바오로 대성당의 재건을 위해

 

전세계 교회에 특별 요청을 하였다.

 

그 당시 이름 있던 건축가 벨리, 폴레티, 베스피냐니, 칼데리니 등이 참여하여

 

원래 대성당의 설계도대로 복원하였고, 1854년에 교황 비오 9세가 축성하였다.

 

원래의 대성당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전과 똑같이 건축된 성당의 길이는 132미터, 

 

폭 30미터로  로마에서는 성베드로 대성당 다음으로 규모가 크며,

 

전세계 10대 대성당 중의 하나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 St Peter's Basilica ]

 

성 베드로 대성당은 로마 가톨릭교의 정신적인 수도이자, 가톨릭 순례 여행의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예수가 죽은 후 각국을 다니며 전도하던 베드로는 현 교회 언덕에서 64년

네로 황제에 의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되었다.

313년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24~349년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에 바실리카를 지었다.

1506년 교황 니콜라스 5세가 새로운 바실리카 건축을 명하면서 거대한 대성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120여 년 동안 콜로세움이나 판테온에서 수많은 자재를 약탈해

건물을 지으면서 로마 문화재가 많이 훼손되고,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발행해 나중에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빌미를 제공하는 등

수많은 사연을 남기며 세계 최고의 건물이 탄생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로마 가톨릭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큰 성당이다.

깊이 218m, 높이 137m, 총 면적이 22,067㎡로 축구장 4면보다 넓고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기둥 778개, 제단 44개, 모자이크 135개, 동상 395개로 구성된다.

쿠폴라(돔)는 1547년부터 대성당의 건축에 끊임없이 정진했던 미켈란젤로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그의 제자인 쟈코모 델라 포르타가 맡아 1590년에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돔 내부의 직경은 42.56m, 정상까지의 높이는 136.57m이다.

돔에서 내려다보는 시내 전경이 매우 아름다우니 꼭 올라가 봐야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정면은 카를로 마데르노의 설계로 1612년에 완성되었다.

폭 114.69m, 높이 45.55m로 거대한 창문들과 입구, 로비로 이어진다.

최상단에는 넓은 공간이 있고 하나의 발라우스트라(작은 원주들) 위에

6m 높이의 조각들이 있으며 옆에는 두 개의 탑(종탑과 시계탑)이 있다.

가운데 창문은 교황의 강복대로 교황이 새로 선출되었을 때나

성탄절과 부활절에 "우르비 에트 오르비(Urbi et Orbi, 도시와 세상에)"라는

축하 메시지를 전해주는 곳이다.

회랑의 5개의 문들은 각각 성당 내부 공간을 구획하는 다섯 개 통로의 입구다.

왼쪽의 첫 번째 문은 '죽음의 문(Porta della Morte)'으로

이 문에는 예수의 죽음, 성모마리아의 죽음, 교황 요한 23세의 죽음 등이 청동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가운데 '청동문(Porta di Bronzo)'은 피렌체 조각가인 안토니오 아베룰리노가

1455년 옛 콘스탄티누스 시대 성당의 것을 옮겨온 것으로

하단에는 베드로, 바오로 성인 두 분의 순교 모습이 있다.

오른쪽의 '거룩한 문(Porta Santa)'은 25년마다 있는 성년()에만 열린다.

나머지 두 개의 문은 선과 악의 문, 성찬의 문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거대하고 장엄한 공간에 압도되고 호화롭게 장식된 내부에 말문이 막히게 된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서 오른쪽을 보면 미켈란젤로의 걸작 <피에타 Pieta>가 있다.

성당 안의 조각품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가 성모의 팔에 안긴 모습을 조각했다.

미켈란젤로가 24세 때(1499년) 제작한 <피에타>는 여러 작품 중 유일하게 서명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쿠폴라 아래에는 베르니니가 제작한 발다키노(천개)가 중앙 제대를 덮고 있다.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요청으로 만든 것으로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돔과 함께 르네상스,

바로크의 양대 예술작품 중 최고로 일컬어진다.

네 개의 나선형 기둥으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올리브 가지 모양이 장식되어 있다.

발다키노의 높이는 29m이며 중앙 제대 아래 지하에는 

성 베드로를 비롯한 초기 기독교 시대의 묘지가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교황 요한 23세(1963년)와 바오로 6세(1978년)의 무덤도 볼 수 있다.

 

대성당 지하 무덤 출구 앞에 있는 성 베드로의 청동좌상은

13세기 플로렌스 출신의 조각가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작품이다.

베드로의 오래된 대리석상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것이다.

중세부터 이곳에 다녀간 신자들이 베드로의 발에 입맞춤해서

오른쪽 발가락이 거의 다 닳아 버렸다.

 

홈페이지

 

바티칸 박물관과 베드로 대성당 출입구

 

 

바티칸 광장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전면

 

 

 

 

 

 

 

 

교황의 강복대 발코니 

 

 

 

 

 

피에타 상과 성베드로 청동상

 

 

발다키노(천개)--베드로 제대

 

 

 

 

 

 

 

 

 

 

 

 

 

 

 

 

 

 

 

 

 

중앙 돔의 천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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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티칸미술관 [ Musei Vaticani , ─ ]

 

바티칸의 산 피에트르 대성당에 인접한 교황궁 내에 있는 미술관으로,

역대 로마 교황이 수집한 방대한 미술품·고문서·자료를 수장()하고,

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대화가에 의한 내부의 벽화·장식으로 유명하다.

창설은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 때 벨베데레의 정원에 고대 조각이 전시된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클레멘스 14세 치하인 1773년이다.

현재 본관은 피오 클레멘티노미술관·도서관·성()유물관·회화관 등 많은 부분으로 나뉘고,

또 각실은 보르지아실()· 라파엘로실· 지도실이라는 특유의 명칭으로 불린다.

미켈란젤로나 안젤리코의 벽화로 유명한 시스티나성당·파오리나성당·

니코로 5세 성당 등도 미술관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 보통이다.

주요 작품은 고대조각에 《아포크슈오메노스》 《벨베데레의 아폴로》 《벨베데레의 토르소》

라오콘》, 고대 회화에 《오디세우스 이야기》 《아르드브란디니가()의 혼례도》,

중세 회화에 《웨르기리우스사본()》 《여호수아기()》,

그리고 르네상스 회화에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 《최후의 심판》,

라파엘로의 《성체의 논의》 《아테네학당》 《그리스도의 변용》,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히에로니무스》,

카라바지오의 《그리스도의 매장》 등과 역사적인 고문서 ·공문서류도 소장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티칸미술관 [Musei Vaticani, ─美術館] (두산백과)

 

 

 

 

촬영이 허용되지 않는 최후의 심판, 천지창조 등의 미술작품 사진은 미술관 뜰에 전시되어 있다.

 

 

 

 

 

 

 

 

 

 

 

 

미술관 복도 천정화와 양편의 양탄자 지도 등은 사람에게 떠밀려 자세히 볼 수도 없다.

 

 

 

 

 

 

 

 

 

 

 
카타콤베
'안식처'란 뜻을 가지고 있는 카타콤베는 중세까지만 해도 지하묘지로서 알려진 것은 이 묘지뿐이었으나,
16세기에 초기 그리스도 교도의 지하묘지가 발견되고부터는 모든 지하묘지를 카타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당시 가난했던 로마인들은 가족을 위한 무덤을 땅 위에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돈이 가장 적게 드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이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자연적인 동굴을 이용해서 무덤을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그리스도가 공인되지 않아 그리스도 인들의 박해가 시작되였으며
313년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으로 기독교가 공인 되기까지
거의 300년 동안 박해는 끊이지 않았고 박해를 피해 지하로 피하게 되었다

 

 

지하에 카타쿰베가 위치한 땅 위 모습.--어머어마한 지하세계가 있으리라고 상상되지 않는다. 

 

 

 

 

 

 

 

 

 

 

 

 

2009년 2월 천주교 성지순례 전문여행사인 라파엘 여행사가

주관하는 '성모발현지'를 순례하는 유럽여행을 다녀오다.

하도 오래 전의 여행이라 기억이 불분명한 점은 이해 바랍니다.

 

인천국제공항 출발

얼어붙은 황무지 땅 -- 시베리아의 어느 곳인 듯.

눈과 구름 사이로 보이는 알프스

로마 국제공항

로마 외곽의 숙소

 

로마의 거리 풍경

대 목욕탕의 유적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이탈리아어: Basilica di San Giovanni in Laterano)은

로마 교구대성당이자 로마의 주교인 교황의 좌(座)가 있는 대성당으로

대개 라테라노 대성당이라고 간략하게 부른다.

 

대성당의 공식 명칭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 복음사가 대성당.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교 성당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당이자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대접받고 있다.

 

정면 외관에는 ‘구세주 그리스도(Christo Salvatore)’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모든 총대주교좌 성당을 대표해서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 그리스도에게 봉헌되었다.

교황좌(Cathedra Romana)가 있는 로마 교구 주교좌 성당으로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다른 어떤 성당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기에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조차 예외는 아니다.

 

대성당은 바티칸 시국 영토 안에 있지 않은데, 대성당이 있는 토지는

이탈리아 공화국로마 시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다른 몇몇 건물의 경우처럼 라테란 조약의 체결과 함께 로마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성좌의 자산으로서 특별한 치외법권 상태를 누리고 있다.

교황 제대

라테라노 대성당 오른쪽에 위치한 십자가 성당

예루살렘을 방문한 헬레나 성녀가 예수님이 재판 받았던 빌라도 법정의 계단과 죽임을 당했던 십자가를 가져와 모셔져 있는 성당

 

성모마리아를 기억하는 최초의 성당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

 

 

로마의 상징인 콜로세움

로마 개선문과 천사의 성(세인트 엔젤로 캐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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